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10. 2024

목우씨의 첫사랑 편지(1)

제1화 : 첫사랑의 편지(1)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어느 때든 첫사랑이었고, 그래서 그때 학생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모두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부터 길게는 46년 전, 짧게는 34년 전의 편지를 공개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1) *


  선생님, 읽어주실래요.

  비가 와요.
  비는 어떤 슬픔 같은 것으로 하여 심연의 깊은 이랑 사이엔 어느새 물이 차오르고 있어요.
  비 오는 저녁에 버려두었던 추억의 파편들을 모두 담아내고 싶어 짐은 왜일까요?

  추억 속에서의 모든 것들은 그리움으로 새겨지던 것을…
  모두가, 모든 것이 그립고 아름답기만 해요.
  이렇게 뎅그마니 방 하나를 소유하고서 질식할 것만 같은 우울과 고투를 벌이고 있자니 저에게 고마움을 베푸신 모든 이들의 가슴들이 하나하나 느껴져 오는군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일찍 문안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갑자기 기온이 내려 선생님의 출퇴근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지요.
  선생님의 밝으신 웃음은 저희들에게 기쁨을 주셨듯이 그곳 학생들에게도 기쁨을 주실 테죠.

  선생님, 이렇게 혼자 가만히 상념에 잠겨 있으니 선생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그리워져요.
  조금 전에 (루이제 린저)의 [고원에 심은 사랑]을 다 읽었어요.
  주인공 ‘유리안느’의 정신적 사랑의 방황은 오늘날의 많은 여인들의 사랑과 갈등과 방황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어요.



  ‘유리안느’의 외로운 가정적 환경이나 또 그녀에게 닥쳐온 환경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좌절의식 …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부자인 ‘마트리’와 한 가난한 시골의 시인 ‘핵클리프’ 사이에서 사랑의 고뇌를 갖게 된답니다.
  더구나 그들 둘은 죽은 어머니의 애인들이기도 했으며, 그 어머니를 에워싼 그들 두 사람의 집요한 싸움은
마침내 그녀의 딸인 ‘유리안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답니다.

  이 작품 속에서 ‘마트리’는 곧 부와 행복과 안일의 상징이 될 수 있죠. 반면 ‘핵클리프’는 쉬타인 휠트의 한 가난한 자선적 의사로서 모든 질병과 가난과 싸우는 박애적 인간의 한 표사이라고 할 수 있죠.
  이처럼 상극된 환경과 정신세계를 지닌 두 남자 사이에서 ‘유리안느’의 방황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숱한 갈등을 일소하고 ‘핵클리프’를 선택한답니다.

  (루이제) 린저의 개성 있는 작품이 퍽이나 실감이 가는군요. (독서) 토론이란 것을 해보고 싶어요.

  밖은 어둠의 천국입니다.
  하루라는 시간이 여과되어 제게 남긴 어둠 속의 공간,
  밤의 여신이 제게 일깨워준 고독과 사색.
  음악이 김처럼 방안 가득히 서려요.
  음악은 마음의 평정을 되돌려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음악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아요.

  선생님,
  이제 8월은 뜨거운 자태를 감추어 가고, 9월이 가만가만히 다가오며, 어여쁜 미소를 짓고 있어요.
 저는 8월을 사랑해요. 8월에 보고, 8월에 소유했던 것들을 위해서 8월 속의 여름날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요.




  사계 중에서 여름을 좋아하게 된 것은 16세 그 무렵이었을까요?
  악랄한 햇볕이 옷 속에 들어 있는 육체까지 일직선으로 꽂혀 들어올 때의 그 무서운 힘이 좋았어요.
  감히 한숨 한 번도 내뿜을 수 없는 열기 속에서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는 여름 전체가 자랑스러웠어요.
  여름은 이제 타오르는 열기를 가만히 식히며 이별의 아픈 눈물을 서럽게 토해내고 있어요.

  지난번 여름 열기가 한창일 때 거제 구조라에서 캠핑을 갔어요.
  2박 3일의 바쁜 여정에서 돌아와 검둥이가 다 된 모습을 보고 꼴깍할 뻔했어요.
  텐트 속에서의 생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정말 재미있었어요.

  선생님,
  이젠 화창한 햇살이 걷힌 언덕에 건조한 바람의 새로운 물결이 불어오겠지요.
  길거리로 몰려나온 아이들은 슈트라우스의 왈츠와도 같이 몸이 재잘거리겠지요.
  몹시 기다려지는군요.

  고요히 익어가는 내일의 희망은 아침의 명상을 그리고, 저의 시선은 뚫어지도록 먼데 하늘을 더듬어요.
  지금 끝없이 멀어져 가는 꿈길에서 들려오는 [환상교향곡]을 어렴풋이 흘려보내고 멀리 침묵 속에 걸어갈래요.

  건강하세요.

  1979년 9월 17일 ○○○ 올림




  <함께 나누기>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언제나 첫사랑이었습니다.


  이 학생의 편지를 읽으며 그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1978년 한 해를 경남 소재 여고에서 보내고 이듬해 부산으로 옮겼으니 고작 1년밖에 안 되었건만 추억은 십 년이 훨씬 넘는 듯.
  편지 쓴 소녀는 당시 여고 2학년. 아래 두 구절은 지금도 제가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멋집니다. 물론 제 책갈피에 넣어둔 구절이기도 합니다.

  “밤의 여신이 제게 일깨워준 고독과 사색. 음악이 김처럼 방안 가득히 서려요.“
  “악랄한 햇볕이 옷 속에 들어 있는 육체까지 일직선으로 꽂혀 들어올 때의 그 무서운 힘이 좋았어요.”

  이 소중한 편지를 삼십 년 넘게 창고에 보관했는데, 십여 년 전 그만 억수 같이 내리던 폭우에 홀딱 담기고 말았습니다. 4/5는 완전히 젖어 폐지가 됐고 그나마 대충 글 보이는 편지만 찾아 눈의 피로감을 참아가며 옮깁니다.

  이제는 다들 환갑 갓 지났을 때쯤 되었으니 어쩌면 아들딸 출가시켜 손주들 맞이한 제자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저께 은행에서 뽑아온 깔깔한 새돈 나눠줄 준비를 하리. 잠시 뒤 제수도 차리고 세배도 받고.
  청마 유치환은 정운 이영도 시인과 플라토닉 러브를 하며 연서를 5천 통이나 썼다는데, 사후 30년 뒤에 공개하란 약속을 어기고 한 달 뒤 책으로 펴냈습니다.

  저는 이제사 공개합니다. 30년은 훨씬 지나 45년에 접어드니까요. 별 의도 없이 그냥 기록 삼아 씁니다. 남은 편지마저 다치면 끝이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긁적긁적(6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