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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11. 2024

목우씨의 첫사랑 편지(2)

제2화 : 첫사랑의 편지(2)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언제나 첫사랑이었고, 그때 학생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당연히 첫사랑의 편지가 됩니다.
  오늘 편지는 당시 여고생들이 쓰던 만연체 형태의 표현이 아주 많습니다. 즉 묘사에 중점을 둬 표현을 길게 늘여 쓰려는.


         * 첫사랑의 편지(2) *


  검게 채색된 어둠의 윤회 속에, 풍화돼 가는 기억의 자취 속에, 내 가냘픈 밤의 정열이 흘러요. 적막만으로 이어진 이 한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호소 호소들.

  안녕하시겠죠. 회신이 늦어 죄송합니다. 지금쯤 선생님의 방황도 종말을 고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가질 수 있는 많은 것 중에서 진실로 가질 것은 어쩌면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곁에 두고파 하던 나의 소중한 것(?)마저도 가져볼 수도 바라볼 수도 없는 현실로부터 마지못해 머언 미래에 붙어져 버리고 말았을 때, 제겐 오직 서러운 여운에 잠긴 상처투성이의 여운만이 남겠지요.

  어차피 에메랄드빛 꿈으로 충만된 나래 속의 오늘은 오늘의 초려한 기쁨으로써 귀착되어야 할 헛된 망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말 테죠.
  대화 잃은 사이사이에 흐르는 침묵에 조화 잃은 음모처럼 추억의 가쁜 숨결이 터져 분주히 귓바퀴를 맴돌 때 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조그만 슬픔을 더욱 확대해버리고 말아요.




  모두들 보내고 난 무심한 시간들. 바람 찬 대지 위에 내 작은 공간은 떨려서 서러울 뿐. 희미해지는 연륜을 헤아리면서 홀로 거니는 마음속엔 아득한 발자욱처럼 시들어버린 한계점이 지나는 소리.

  언제부터였을까? 자그마한 손아귀에 땀이 나도록 쥐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허전함을 메우지 못해 애쓰는 밤이면 깊은 어둠 속의 허공을 마주 대해 초점 없는 눈동자를 굴리는 버릇이 생겼어요.

  고이 접어둔 소망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흔들림에 쏟아부은 해쓱한 미소로 허우적대는 스스로를 다독여주는 빈 기억의 그늘을 내립니다. 채색된 아쉬움이 더 바라기 전에...

  계속되는 우리의 곡예 중에 지울 수 없는 파도가 다른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영원한 우리들의 죄가 신비로운 전설을 잠재워가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이겠죠.
  허무ㆍ죽음ㆍ거짓말 같은 사실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청빈한 맘들은 다시금 빈곤의 쓰라림을 스쳐야 하겠지요.





  며칠 전에 한수산의 [부초]를 읽었어요. 곡마단의 생활을 소재로 한 글이었죠.  서민적인 애환이 담겨 있는 그 글을 읽었을 땐 뭉클한 어떤 막연한 서글픔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제가 미처 풀지 못한 생의 과제를 그 책은 제시해 주더군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거예요. 책과 음악이 있는 삶은 결코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 같군요.

  어둠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홀로 거니는 마음속엔 아득히 잊었던 그리움이 조각조각 뭉쳐 모여 아늑한 안식을 구하며 애타게 발돋움해요.
  싸늘한 공기가 어느새 상쾌한 감촉으로 제게 닿고 그것으로 하여 세포 하나하나가 목마름을 씻고 새로운 생명력으로 눈을 뜨면 유열로 굽이치는 가슴. 가슴들이여!

  고요히 익어가는 내일의 희망은 아침의 명상을 그리고, 저의 시선은 뚫어지도록 먼데 하늘을 더듬어요. 지금 끝없이 멀어져 가는 꿈길에서 들려오는 ‘환상교향곡’을 어렴풋이 흘려보내고 침묵 속에 걸어갈래요.

  건강하세요, 안녕.

  일천 구백 칠십 팔 년 팔월 십칠일
  제자 ㅇ이 올림




  <함께 나누기>


  제게 첫 학교는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절로 첫사랑의 편지가 되구요.

  시대가 바뀌면서 우린 몇 가지를 잃어버렸지요. 그 가운데 하나가 ‘손편지’입니다. 더불어 감성도 낭만도 사라졌고요.

  편지 속에 나와 있는, "회신이 늦어 죄송합니다. 지금쯤 선생님의 방황도 종말을 고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이 부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소녀가 다니던 학교를 떠나 부산으로 옮겼을 때 교직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가질까 고민하던 시절이라 어쩌면 그 말을 했을지도...

  이 소녀는 참 감성적이었지요. 가을 어느 날 지각조차 안 하던 애가 어떤 연락도 없이 결석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고, 집 전화도 없는 집이 태반이던 시절. 연락할 길이 없어 다음날 등교하기만을 기다렸는데..

  뒷날 학교 온 소녀가 내민 결석서. 거기 사유란에 눈길이 갔습니다.
  “등굣길에 코스코스가 저랑 놀자고 해서...”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야단치지도 못하고 그냥 받았지요.

  이 소녀, 지금은 환갑 지났으니 할머니 되었을지도.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안부라도 알고 싶습니다. 이미 필력(筆力)은 고 1학년 시절에 저를 능가하고 있었으니 글을 계속 썼는지도 궁금하고요. (이 편지는 고 1학년 때 씀)
  부디 어디에서든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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