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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09.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66)

제66화 : 울엄마의 '단술' 수난사

    * 울엄마의 '단술' 수난사 *



  <들어가며>


  단술이랑 감주는 같은 말이다. 단술이란 토박이말을 한자로 바꾸면 달 ‘감(甘)’ 술 ‘주(酒)’가 되니 말이다. 단술과 식혜는 다르다. 시중에 잘 팔리는 ‘비락식혜’ 할 때는 식혜가 맞다. 허나 단술은 낱말에 ‘술’이 들어 있으니 음료수가 아니라 술이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단술은 누룩을 이용해 발효한 (약한 도수의) 술이며, 식혜는 엿기름으로 삭혀 만든 음료수다. 다만 이 글에선 고향 서부경남에서 오랫동안 식혜 대신 단술이라 써왔기에 아직도 귀에 익은 단술이란 용어를 쓴다.




  <제1화 : 검은 단술>

  내가 우리 집에서 단술을 처음 먹었을 때는 교사로 취직한 이듬해 설날이었다. 돈이 생기니까 단술 담그기를 울엄마가 시도했다는 뜻이다. 첫 작품은 검은빛(?) 단술이었다. 단술은 완전히 하얗지는 않아도 검은빛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 검은빛 나는 무엇인가를 넣었는가?
  그렇다. 울엄마가 단술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로 잘못 넣었다. 잘못 넣기는 했어도 맛은 단술 맛이었다. 다만 빛깔만 검은빛일 뿐. 울엄마는 우리보다 조금 잘 사는 아랫집 명찬이네 엄마에게서 단술 만드는 비법(?)을 배웠던가 보다.

  처음 만드니까 과정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써 드디어 먹음직한 단술이 나왔다. 헌데 단술을 본 우리 가족 모두 깜짝 놀랐다. 검은빛이었으니까. 우리 집에서 먹어보지 못했을 뿐 다른 곳에서야 다 먹어봤으니 빛깔이야 뭐.
  가장 먼저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세상에 살다 살다 시커먼 단술도 다 보제. 우째 이런 일이 있노?”
  이어서 막내누나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엄마, 뭘 넣었기에 빛깔이 이렇슈?”
  동생도 거들었다.
  “아 엄마, 이기 단술이가? 똑 한약 달인 물 같잖아.”
  나도 점잖게 한 마디 덧붙였다.
  “설탕 대신 계피를 넣었나?”



  울엄마가 명찬이 엄마에게 비법을 전수받기는 제대로 했다. 다만 설탕을 넣을 때 실수를 했을 뿐. 그러니까 단술 만들 때는 백설탕을 넣어야 하는데 흑설탕을 쓴 게 실수라면 실수.
  아마도 엄마는 집에 남은 흑설탕을 처분하려던 차 단술 만들며 거기에 넣었던 모양이다.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한 생각 없이 맛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허나 입이 까다로운(?) 식구들의 등쌀에 처음 만든 단술은 칭찬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군소리만 왕창 들어야 했다.


  <제2화 : 하얀 단술>


  다음 해 설날을 앞두고 울엄마는 다시 단술 만들기에 도전했다. 실컷 고생해 만든 작품(?)을 비난하던 식구들에게 한 방 먹일 생각으로. 두 번째 만든 단술은 분명 하얀 단술이었다. 허나 우리 식구들은 지난 설날에 맛본 검은빛 단술보다 더 분노했다. 아니 아예 먹지 못했다.
  작년에 만들었던 레시피가 잘 기억 안 나는지 아랫집 명찬이 엄마에게 다시 찾아가 알아 온 것까진 좋았다. 흑설탕으로 인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실패를 잊으려 부엌 한구석에 놓인 백설탕 – 백설탕으로 보이는 무엇– 을 넣기까지도 아무 일 없었다.


(단술 만들기 1 -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엿기름)


  그러나 엄마가 백설탕이라고 넣은 게 문제였다. 즉 설탕이 아니었다는 말. 그럼 뭔가? 하필 막내누나가 낮에 혼자 있을 때 배고프다고 제 입에 맞는 요리 만들어 먹느라 설탕과 조미료의 위치를 바꾼 게 문제였다.
  설탕이 들어가야 하는데 미원이 잔뜩 들어갔으니. 이 글을 쓰는 내 속이 지금도 다 니글니글하다. 하필 맨 먼저 맛본 사람이 나였기에. 설 전날 밤 우리 집에선 모녀대전이 크게 벌어졌다. 먼저 말펀치 날린 사람은 울엄마였다.

  “야 이년아, 와 늘 놔두던 자리에 있던 설탕을 옮겨놓았노!”
  “아 엄마, 그걸 말이라고 해? 만드는 사람이 잘 살펴서 넣어야지!”
  아버지가 거들었다.
  “아이구 저 반피(‘바보’의 경상도 사투리)를 내가 사십 년 넘게 데리고 살았으니...”
  동생도 이었다.
  “엄마도 참, 저번엔 검은 단술 이번엔 미원 단술이라니...”
  나도 한 마디 했다.
  “내년이 기대된다.”


(단술 만들기 2 - 찹쌀과 맵쌀 반반씩 섞어  고두밥을 찐다)


  <제3화 : 역시 못 먹게 된 단술>


  검은 단술과 미원 단술로 식구들의 신임을 잃은 울엄마는 절치부심 이번엔 꼭 성공하고 말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그해 추석을 앞두고 또 만들었다. 흑설탕은 없으니 검은 단술이 될 염려는 없다. 첫 실패 이후 남은 흑설탕을 모두 단술 레시피를 전수해 준 명찬이네에 주었다고 하니.
  미원인지 아닌지는 아예 직접 입에 넣어보고 설탕을 넣었으니 실패할 리 없다. 그렇게 울엄마는 생각했던가 보다. 처음부터 애쓴 보람으로 제대로 된 단술이 만들어져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가장 먼저 먹어 확인했다.

  달고 참 맛있었다. 내가 먹어본 단술 가운데 - 남의 집을 포함해도 - 가장 맛있지 않았을까. 식구들이 다 모일 저녁을 은근히 기대했다. 모두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연발해 나오기를 확신했다. 왜냐면 '기미장남'의 까다로운 검수 과정을 통과했으니 말이다.
  저녁에 맛을 본 식구들 얼굴이 환해졌다. 예상한 대로 칭찬의 말이 쏟아져 나왔고. 다만 아버지만 워낙 입이 무거워(?)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헌데 한 번 낀 마(魔)는 비켜가지 않을 셈이런가. 추석 무렵이건만 그해 따라 날이 무척 더웠던 게 문제였다.

  더우면 단술이 쉴 것 같아 상하지 않도록 일부러 시원한 곳에 놔둔다고 바깥 장독 위에 삼베를 덮어 둔 모양이다. (당시엔 냉장고가 없으므로) 그날따라 하필 한밤중에 소나기가 엄청나게 퍼부었고... 울엄마는 한 번 잠이 들면 업어가도 모르는 분. 다른 가족들은 설마 밖에 놔두리라 생각 못했고.

  추석날 아침, 우리 집에 또 한 바탕 요란한 말이 오가고 말았다.


(단술 만들기 3 - 고두밥에 엿기름 넣어 삭히며 밥알이 떠오르는데 그 상태에서 두 시간 더 두면 식혜가 된다)


  <마무리 : 그래도 그 시절 그 사람들이 그립다>


  이제 단술 때문에 진한 추억거리를 제공했던 울엄마는 하늘에 계신다. 아버지도 동생도 함께 갔으니 같은 곳에 모여 살지 모르겠다. 다만 하늘에서는 제대로 된 단술 만들어 아버지와 동생에게는 물론 함께 사는 하늘나라 영혼들과 맛있게 나눠 마셨으면 한다.
  지금은 흑설탕 넣은 검은 단술도, 설탕 대신 조미료 넣은 미원 단술도, 소나기 가득 담긴 단맛 사라진 단술도 다 그립다. 미원 단술이야 한 숟가락밖에 못 먹겠지만 검은 단술과 소나기 가득 담긴 밍밍한 단술은 한 사발 거뜬히 마실 것 같다.

  45년 전 환갑을 지난 그 나이에 가족 위해 단술 만들어주던 울엄마가 그립다. 설날이라서 그런지 그냥 무척. 이젠 눈물도 마를 줄 알았는데...

  *.  사진은 말고 나머지 사진은 '요리보고의 맛있는 세상'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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