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17. 2024

목우씨의 첫사랑 편지(4)

제4편 : 첫사랑의 편지(4)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언제나 첫사랑이었고, 그때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당시 여고 1학년 학생이 보낸 편지인데 물에 심하게 젖어 편지 상태가 극히 좋지 않음에 양해를 구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4) *


  선생님!
  지금 창밖엔 희뿌연 양산 하늘이 진한 회색빛의 외로움을 토하고 있습니다. 그 회색의 심연을 밟으며 선생님께 글월을 드려요.

  선생님, 인생은 안개 속이라고 하셨죠. 그러기에 숱한 희비곡선이 버스 노선처럼 얽혀져 있고, 인정과 사랑으로 조화된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면면히 이어져 있다고 했죠.
  전 인생이란 우리가 온 심장으로 사랑하는 그 무엇으로써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공허하고 불만족한 것이 될 테죠.




  저는 인생을 몰라요.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어째서 짧은 생애를 엮어나가면서 온갖 시련과 숱한 고뇌를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되죠.
  이상과 현실이 서로 모순되는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순간순간마다 절실히 경험해요. 인생은 낯선 땅에서 벌이는 전투와 같은 것이라고 ….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인생은 뒤로 향해야만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죠. 그러나 인생은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퇴색된 종이 위에 번져가는 검붉은 물감처럼 세차게 밀려오는 땅거미가 뇌리를 덮을 때면 밤의 거친 숨소리는 산산이 부서져 대지 위에 깔러 집니다.
  사라진 시간 속에 타다 남은 세월은 폐허된 동정. 갈색 잎새에 얽힌 사연은 헐어버린 내 심정의 번민인가. 잃어버린 날들의 순한 말들이 새겨진 동공이 초점을 잃은 채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마디마디의 괴로움은 그리움으로 새겨지는 것.




  먼 훗날에 서서 이제 여운마저 사라져 남은 것은 없지만 다만 꿈속에 뿌려져 있던 그리운 사람들의 발자취인 토막처럼 부서지던 밤은 언제인가 그토록 괴로웠던 황량한 종말 …. 그리고 머언 날 꿈이 개인 그 날에 아롱져진 뇌리는 두터운 빙판의 화살….

  밖은 어둠의 천국이군요. 하루라는 시간이 여과되어 남긴 조그만 고독 …. 고독은 밤의 여신이 일깨워 준 것이었을까요. 음악이 김처럼 방 안 가득히 서리는군요. 어둠이 울울한 숲그늘을 찾아 이마를 비벼대면 혼곤한 잠에 젖어 갑니다. 어둠 속의 공간을 메우면서 젊음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문득 괴테의 “진실을 아는 자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나그네처럼 끝없이 진실을 찾아 새로운 것을 찾아 떠도는 정열을 길러주는 말인 것 같아요.
  젊은 우리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살아 있다는 증거인 젊음의 순수성과 유연성을 우리들 자신이 하루라도 더 연장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전 요즘 일체의 외출을 삼가고 방 하나를 뎅그마니 소유하고서 음악 듣고 독서하면서 소일하고 있어요. 밤엔 물론 일기 쓰고 약간의 사색도 곁들이고요. 이제 이 모든 것들이 타성이 되어버려서인지 지루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해요.
  이른 아침에 가까운 산에라도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취침 시간이 늦어지다 보면 일찍 일어날 수 없어지고 말잖아요. 평소 취침 시간이 새벽 3시 경이니까요. 저의 늦은 버릇이 할머니의 짜증을 돋우는 결과가 된답니다. 늦게까지 라디오 채널을 맞추고 불을 환하게 켜놓고 뭔가를 긁적이고 있으니까요. 안면방해를 범하고 있는 셈이지요.

  밖은 바람이 세차군요.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세요. 개학 날에 건강한 모습의 선생님을 뵙게 되길 바라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일천 구백 칠십 팔년 팔월 십팔일
                                     ○○○ 올림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산골일기(16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