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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4. 2024

목우씨의 첫사랑 편지(5)

제5화 : 첫사랑의 편지(5)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언제나 첫사랑이었고, 그때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은 첫 근무지였던 여고 제자가 아닌 부산 모 여중에 근무할 때 소녀가 보내준 편지를 소개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5) *


  선생님께 올립니다.

  회사의 정원 담 너머로 붉은 적색의 화려한 장미가 몽우리짐과 아울러 성질 급한 놈은 벌써 피고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장미의 향기로움에 선생님께 안녕을 전합니다.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선생님을 가까이 모신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조금 게으른 탓인가 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일상의 생활에서 문득문득 떠올리기도 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면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많은 날들 중의 하나인 선생님의 날이 있습니다. 장미 한 송이 꺾어 선생님 가슴에 달아드려도 이제 누구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제자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12년 동안 수없이 많은 선생님들의 얼굴이 저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왜 하필이면 선생님께 색다른 인간의 情을 느끼며 지극히 인간다운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다른 선생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친민감이 선생님의 매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일 처음에 우리 반에 오신 선생님은 ‘빙산 같은 인간’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은 어떤 말씀으로 아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습니까?

  영원히 변하지 아니할 것만 같은 총각 선생님이란 감정으로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아마도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버린 시간의 흐름을 영아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받아들일지 의문입니다.

  늘 선생님의 살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인간인 나에게 중학 총각 선생님은 이제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어 작은 울타리를 지켜가는 정말 지극히 보통인 인간이 되었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무거운 책임이 어깨를 누르고 있겠죠.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진실은 피어 있었고 음성에는 변함이 없었던 나의 선생님 앞에, 16살의 소녀는 숙녀가 되어 나타나리란 상상을 해보셨을 생활의 여유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영아가 셈한 나이도 아닌데 벌써 23살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웃을지 모르지만 사랑을 감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능력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지나치리만큼 똑똑하고 완벽한 드리마틱한 남자 – 그는 책을 아주 좋아하는 모범생이었지만 사회에 적응해가지 못하는 어릴 적 우정으로 항상 옆에 있는 오빠. 그는 28살이랍니다.

  선생님, 방황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결혼의 조건으로는 없습니다. 한 가지 나의 순수한 마음으로 타성에 젖지 말고 선택하라면 사랑이란 단어의 이름 아래 그의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 어찌 미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왠지 자꾸만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선생님을 부르고 싶습니다. 젊음뿐인 빈손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자꾸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의 날에는 제일 먼저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사모님이랑 ○실이랑 ?랑 모두 건강한가 안부부터 물어야 예의였는데 죄송합니다.
  그리고 원고지에 띄어쓰기도 없이 글을 적은 것은 선생님의 손에 더 오래오래 읽는 동안 머물기 위함입니다.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이 다음에 편지를 적을 때는 좀 더 정성껏 글을 적겠습니다.




  선생님, 언제나 행복할 수 있는 작은 기쁨이 선생님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 있었습니다.

  “이 세상 추운 날 하나 없이 항상 따뜻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눈물겹게 감사하며 너와 나 가난한 길손이 되자.”

                   1985년 5월 15일(수)


  <함께 나누기>

  시간이 지나면 옛것은 모두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지만 그럴수록 기억나지 않은 일들이 야속합니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직장생활 하는 23살 된 제자가 28살 된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의 가진 바가 어른들이 생각하는 조건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반대하시겠지요. 자기 딸이 멋진 남자일 뿐 아니라 고생시킬 위험이 없는 사윗감이길 바라시기에.

  제가 뭐라고 답장했는지 전혀 기억 안 나고 이 소녀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름을 뒤에 적어놓았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그래서 추억이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편지 속의 구절이 저를 붙잡습니다.
  “원고지에 띄어쓰기도 없이 글을 적은 것은 선생님의 손에 더 오래오래 읽는 동안 머물기 위함입니다.”



  *. 원고지를 세로로 세워 띄어쓰기 없이 볼펜 아닌 연필로 써, 언뜻 생각하면 예의 없어보이나 오히려 더 정이 담긴 것 같아 이 편지를 선택했습니다. 다만 글벗님들은 연필로 쓴 편지를 찍은 사진이기에 읽기 불편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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