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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15. 2024

목우씨의 산골일기(164)

제164화 : 쑥, 쑥쑥?

      * 쑥, 쑥쑥? *



  3월도 중순에 이르니 산과 들에 봄빛이 제대로다.
  이른 봄 땅에 달라붙어 피는 복수초 노루귀 봄까치꽃은 이미 만발하거나 질 무렵이고, 나무에 핀 생강나무꽃과 매화도 전성기를 지난 즈음이다. 대신 다른 꽃들이 순서 기다리는데 수선화가 며칠 전부터 기회 엿보더니 그저께 내린 비를 어깨 삼아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밭 가느라 관리기 돌아가는 소리 또한 꽤나 요란하다. 사람보다 겨우내 잠잠하던 논밭을 일깨우는 소리다. 그럼 나물은 어떤가. 늦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식탁을 상큼하게 만들던 나생이(냉이)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달롱개(달래)와 쑥이 차지한다.




  사실 쑥은 이미 머리 내밀었는데 너무 잘아 양이 얼마 안 돼 캘까 말까 미루다 어제 마을 한 바퀴 돌며 보니 딱 맛있는 크기가 되었다. 아내가 잠시 나가 반 소쿠리 남짓 캐온 쑥으로 저녁에 쑥국 끓였더니 그 향이 한 마디로 '직인다'
  5, 60년대 전 세계 남성들의 가슴을 녹였던 마릴린 먼로가 잠옷 대신 몸에 뿌리고 잤다는 ‘샤넬 NO.5’도, 당 현종을 자신의 치맛자락에 콱 붙들어 맨 양귀비가 사용한 향수도 이맘때의 쑥향보다는 못하리라.




  얼마 전 쑥에 대해 써놓은 글을 읽다 글쓴이가 ‘쑥의 어원’을 언급한 게 눈에 띄어 읽어보았다. 왜냐면 쑥의 어원을 학술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밝힌 논문을 보지 못했기에. 역시 짐작대로였다.
  우리가 동물이든 식물이든 거침없이 자랄 때 ‘쑥쑥’이란 말을 쓰는데, 그 ‘쑥쑥’에서 왔다는 내용이다. 처음 들으면 그럴듯하다. ‘쑥쑥 자라다’에서 쑥이 나왔다? 비 내린 뒤 쑥이 한창 자랄 때는 쑥쑥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지 않느냐는 생각도 든다.

  허나 이는 학계의 정설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나기의 어원을 두고 일어난 현상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즉 한 마을에 사는 두 농부가 여름날 하늘 보고 한 사람은 비가 올 것 같다 하고 한 사람은 오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둘은 ‘소’를 두고 ‘내기’를 걸었는데 마침 그때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소내기’에서 ‘소나기’가 되었다는 식으로.

  우리 말에서 쑥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말이다.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에 나왔으니까.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을 견뎌낸다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내용에서 보듯이 아주 오래된 단어다.




  쑥은 아주 생명력 강한 식물 가운데 하나다. 우리 집 앞 아스팔트를 깔고 난 이듬해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녀석이 바로 쑥이다. 하기야 누구나 다 아는 최악의 원자력 사고인 ‘체르노빌 사고’ 뒤에 가장 먼저 솟아난 식물도 쑥이라 하고, '체르노빌' 지명의 뜻이 쑥이라 하니...

  뿐이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떨어져 그 지역이 잿더미 되었을 때도 쇠뜨기와 함께 쑥이 맨 먼저 돋았다고 한다. 그래선가, 서민의 끈질긴 생명력을 쑥에 비유한 표현이 옛 문헌에 여러 번 언급돼 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어선다는 점에서.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쑥)



  이른 봄의 쑥은 크기가 아주 잘다. 작으면 많이 뜯어야 국을 끓여 먹을 수 있으니 당연히 아낙네들은 좀 더 큰 쑥을 찾는다. 먼저 눈 가는 장소가 바로 길가다. 특히 차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쑥이 잘 큰다. 차량이 내뿜는 열기(매연)가 성장에 도움 되어서라나.
  시골 오일장에 가 쑥을 파는 할머니 좌판에 이른 시기에도 큰 녀석들이 보이면 일단 의심해 봐야 한다. (물론 양심적인 할머니들도 많지만)


(윤두서의 '채애도', 18세기 초)



  쑥(혹은 나물) 캐는 모습의 그림이 동양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서양에도 있으니 옛부터 쑥 캐기는 아낙네의 즐거운 외출이었으리라. 오는 주말에 기온도 올라가고 날씨도 좋다 하니 코에 바람 넣으며, 봄꽃도 보고, 쑥을 캐러 갈 분들에게 팁 몇 개를 준다.
  논둑 밭둑을 피하라. 논둑 밭둑에 나는 풀을 예초기로 베는 부지런한 농부의 논과 밭이라면 상관없다. 허나 힘이 딸리거나 게으른 농부는 제초제를 친다. 밭 안이나 논 안에 치는 농약이야 저농약이니 몸에 덜 해롭지만 제초제는 전혀 아니다.
  농사짓지 않고 묵혀 둔 묵정밭이 가장 좋다. 묵정밭은 주인도 내버려 둔 밭이니 제지할 사람이 없다. 게다가 묵정밭은 한때 밭작물을 심었기에 비록 지금은 황폐하더라도 거름기가 남아 있어 쑥도 실하다.


(까미유 피사로의 '나물 캐는 여인', 1881년)

  


  내가 제대로 그림 그릴 줄 안다면 봄 햇살 받으며 쪼그리고 앉아 쑥 뜯는 여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다. 살짝 쪼그리고 앉아 잘디 잔 쑥을 뜯느라 온 신경 다 바쳐 손 바지런히 놀리는 여인의 모습 그 자체가 바로 그림 아닌가.

  지금 뜯는 쑥은 무조건 쑥국을 끓이지만, 그러다가 조금 더 크면 쑥떡도 해먹고 쑥털털이도 해 먹는다. ‘쑥털털이’ 표준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쑥버무리’라 하지만 내 고향 하동에선 쑥털털이였다.
  쑥으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여러 가지겠지만 억세더라도, 아니 오히려 억세야 제 맛이 나고, 또 쑥향이 가장 짙게 배어나는 게 쑥털털이리라. 쑥국은 끓이는 과정에서, 쑥떡은 만드는 과정에서 향이 많이 사라지는 데 비하여 쑥털털이는 끝까지 향이 그대로 살아남는다.


(쑥털털이)



  원래 쑥털털이는 옛날 보릿고개 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쑥 뜯어다가 쌀가루를 조금 섞어서 쪄먹던 음식이다. 하지만 채 익지도 않은 보리라도 먹어야 했던 그 시절에 쌀가루를 많이 넣을 수 있었을까. 하도 적게 넣다 보니 엉김이 좋지 못하여 털털 털어먹는다 해 쑥털털이라 했다 하니.

  바야흐로 쑥으로 입맛 다시는 계절이 코 앞에 왔다.


  * 글 속의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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