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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16. 2024

목우씨의 첫사랑편지(6)

제6화 : 첫사랑의 편지(6)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언제나 첫사랑이었고, 그때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은 여학생 제자가 아닌 ㅇㅇ 공고 남학생 제자가 보내준 편지를 소개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6) *


  정 선생님께!

  칠흑 같은 어둠이 작디 작은 미로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밀려가고, 먼 발치에서 빛을 발하던 달도 잠이 들었는지 보이질 않고, 까아만 밤의 그림자만이 허허로운 벌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꽉 찬 콘크리트 숲속에서 작은 창을 열고서 계절의 분신을 기다리며 긴밤을 지새우고픈 심정. 어디엔가에 있을 듯한 청아한 미소를 찾아 한 조각 낙엽 타고 천, 만 리 길을 떠나고픈 가을이 가려 합니다.
  인사가 늦었나 봅니다.
  내일모레가 기능사 시험인데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저를 부디 꾸짖어 주십시오.

  선생님,
  전 이상한 녀석이지요. 아무리 생각해 보다도 제 자신이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시험 공부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데 편집실에나 왔다 갔다 하고, 아침이면 공연히 창가에 서서 먼 산을 쳐다보고...
  한 마디로 말해서 갈피를 못 잡겠더군요. 왜냐구요? 전 지금 아주 심한 열병에 걸려 있답니다. 선생님께서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있나요? 물론 있겠지요. 저는 어떤 人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갈수록 쌓여만 가는 그리움 때문에 괴롭답니다.




  상대편은 그것도 모르고 저를 외면하고 피해버리니... 남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낙(樂)이 없답니다. 먼젓번 특활시간! 그때 선생님께서 첫사랑 이야기를 얘기해 주셨지요. 음악선생님을 좋아했다는...

  저는 中三 때 첫사랑을 겪었는데 결과는 무척이나 안 좋았어요. 거기에 힌트를 얻어 체험 반 상상 반 소설을 써 봤는데 너무 줄거리가 다른 책과 비슷하더군요. ‘사랑의 체험수기’와 비슷한 여러 책의 줄거리. 소재가 너무 흔한 일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선생님!
  소설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처음엔 ‘그까짓 것 누가 못 쓰랴’ 하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산 너머 산이 있다고는 하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더군요.
  아무튼 선생님의 지도 아래 성심성의껏 써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시지 말구요. 워낙 글 쓰는 실력이 부족해서...

  그리고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셨음 하구요.
  첫째, 선생님 독사진 있으면 좀 부탁하고, 두 번째, 선생님 집 주소를 알려주십사 하는 겁니다. 세 번째, 언제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집 주소를 가르쳐달라는 건 별다른 뜻이 없고 심심할 때 편지나 하려구요.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어려우시다면 하는 수 없지요, 뭐.






  선생님!
  이런 질문을 당돌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선생님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나이? 왜 여태껏 결혼을 하지 않으셨으며 언제쯤 하실 예정이신지. 가족 관계, 교편을 잡으신 이유 등등...
  편지 쓰기 전에는 알고 싶은 것도 많았었는데 막상 쓰려 하니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고... 아무런 부담도 갖지 않고서...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선생님, 고향이 부산이라고 하셨던가요. 저는 지금 눈을 감고 고향 산천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전에 선생님께 드렸던 ‘관광 기념책’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이제 겨울이 오겠지요. 하이얀 눈이 덮인 끝없는 길을 누구와 손이나 맞잡고 걷고픈 낭만의 계절! 자연의 섭리는 위대하리만큼 다채롭고 장엄하거든요. 그리 훌륭한 곳은 못 되더라도 가장 솔직한 자연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언제이든 기약해 보기로 하고...

  선생님,
  이 까아만 밤에 선생님께선 무얼 하시고 계실까요? 창가에 어둠이 찾아와 머무는 곳에 두 눈 정겹게 내리깔고 사색에 남지었겠지요.
  지금 이 시간!
  겹겹이 에워싼 어둠을 몰아내고 님 계신 곳으로 가고픈 마음... 서푸른 글월이나마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싸늘한 날씨에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11월 13일 밤에
                 - 제자로부터 -





  <함께 나누기>

  오늘 공고 제자의 편지를 읽다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편지 맨 끝에 학생의 이름이 없었다면 저를 좋아한 여학생이 보낸 편지로.
  이 학생 이름을 보는 즉시 누군지 떠올랐습니다. 문예부원으로 당시 교지 편집을 도와주던 학생이며, 또 무주구천동이 고향이라 했던 것도.

  굉장히 섬세했고 내성적인 성격의 학생이었는데 졸업 후에도 종종 편지 보낸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젯밤 글 올리려 편지를 읽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구절구절에 잠시 멈추곤 했습니다.
  내용 상으론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은 자기에게 관심 없는 듯하여 고민을 상담하려는 편지 같은데...
  세 가지 부탁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첫째, 독사진을 보내 달라.'
  이런 부탁은 주로 여학생이 했는데...
  '둘째, 우리 집 주소를 알려 달라.'
  굳이 우표 붙이지 않고 교무실 제 책상 위에 올려두면 될 일인데...
  '셋째,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싶다.'
  교무실에 찾아와 상담하겠다고 하면 조용한 곳에 이야기 나누면 되는데.

  편지 뒤에 따로 적은 제 메모가 없는 걸 보니 당시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듯합니다. 이 제자,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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