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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2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06)

제106편 : 이재무 시인의 '뒤적이다'


@. 오늘은 이재무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뒤적이다
                         이재무     


  망각에 익숙해진 나이
  뒤적이는 일이 자주 생긴다
  책을 읽어가다가 지나온 페이지를 뒤적이고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거듭 동선을 뒤적이고
  외출복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뒤적인다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 [슬픔은 어깨로 운다](2017년)     

  #. 이재무 시인(1959년생) :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83년 [삶의 문학]을 통해 등단. 제27회 [소월시문학상]을 받았으며, 경험과 실감을 중시하는 시를 쓴다는 평을 듣는데 현재 서울디지털대학 교수




  <함께 나누기>     

  몇 년 전 「정깜빡 씨와 박 두번 여사」란 제목으로 글을 써 배달한 적 있습니다. ‘정깜빡 씨’는 저를 ‘박 두 번 여사’는 아내를 가리키는데, 둘 다 자주 잊어버리고선 여기저기 뒤적이는 행동을 곧잘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특히 텃밭일 하다가 쓰던 농기구를 잘 잊어버리고, 아내는 안경을 쓰고 가지 않아 차 몰고 가다 되돌아올 때가 종종입니다. 문제는 농기구를 어디 놔뒀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점입니다. 기억이 안 나니 이곳저곳 뒤적이다 찾으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글픔도 일어나고.     

  1행~6행의 내용은 나이 든 이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 특별히 책갈피에 보관할 구절은 아닙니다. 허나 뒤로 넘어가면 달라집니다. ‘역시 시인은 다르구나!’ 하는 탄성과 함께.     

  “바람이 풀잎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햇살이 이파리를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달빛이 강물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세 행을 보면 ‘뒤적이다’는 말의 쓰임이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보았는가 하며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앞의 '1행~6행'과는 전혀 다른 표현으로 참신성과 운율감이 돋보입니다. 참 맑고 고와서 읽고 또 읽어봅니다. 그러다가 다음 시행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지난 사랑을 몰래 뒤적이기도 한다”     
  ‘지난 사랑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다’ 식의 표현으로 끝날 걸 사랑을 몰래 뒤적이다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지요, 배우자에게 말하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사랑을 몰래 뒤적일 수밖에 없음을.     

  “뒤적인다는 것은 /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의 흔적을 뒤적인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 잊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와 함께 했던 사랑의 시간은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미 심장에 낙인이 찍혀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     
  뒤적일 추억(어제)이 많은 사람은 그로 하여 눈물이 흘릴 기회가 많습니다. 지우려도 지울 수 없기에. 어쩌면 지우고 싶지 않아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낙인 찍을 때의 아픔보다 찍힌 낙인이 주는 아련함 때문에.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다”     
  용의 그림을 그리려다 완성을 앞둔 순간 마지막 눈동자 부분에 점을 찍으며 완성되는 화룡점정의 붙임입니다. 새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 듯이, 그대 그리워 마음속을 뒤적이듯이, 우리는 가끔 뒤적임의 시간을 가지곤 합니다.     

  여태껏 물건을 어디 뒀나 뒤적이다 이제는 마음을 뒤적거리는 짬이 점점 잦아집니다.  뒤적이면서도 무엇을 뒤적거리는지 잊고, 뒤적이다 떠오른 자기 모습에 순간 멈칫하기도 합니다.
  아 참  「정깜빡 씨와 박 두번 여사」이란 제목으로 쓴 글은 다시 쓴다면  「정깜빡깜박 씨와 박 세번 여사」로 바꿀 겁니다. 자꾸만 뒤적임이 늘어납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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