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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11. 2024

목우씨의 첫사랑 편지(14)

제14화 : 첫사랑의 편지(14)

@. 제게 학교와 학생은 어느 때든 첫사랑이었고, 그때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 편지는 부산의 모 여중에 근무할 때의 학생이 고2쯤 되었을 때 보낸 편지로 보입니다. 제가 울산으로 학교 옮긴 뒤에도 계속 연락 보냈던 소녀로 보입니다.


       * 첫사랑의 편지(14) *


  선생님께 올립니다.

  꽃 가게에는 국화꽃 향기로 가득하게 붐비고 있습니다. 가을이 짙어져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산에서도 단풍이 물들어가고 범어사 감나무에는 빨간 주홍빛 감이 태양을 받아 빛나고, 물소리도 기쁜 노래를 연주하는 음악소리에 손이랑 발이랑 물에 담가두고 작은 소리로 흥얼거려 보는 작은 등대지기랍니다.

  가끔씩 가끔씩 떠올려 몇 줄 적어도 보는 낙서가 결국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선생님을 불러봅니다. 사색한다는 계절의 탓일까요? 왠지 코스모스의 흔들림에 부대끼고 싶은 情이 생깁니다. 작은 코스모스를 두 팔로 꽉 안아주고 싶은 그런 기분입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루를 보내시며 이 가을에는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저는 여전히 바쁘기만 하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저 24시간이 아쉽다는 안타까움으로 호흡하고 있습니다. 10月의 행사를 아시면 진정 바쁘겠구나 하실 겁니다.
  13日에 행군대회가 있고, 21~23日 3日 간의 학예제에 저희 문예부의 시화전이 있기 때문에, 약 두 달 가량이나 매일 남아 자작시 발표랑 판넬을 만들기에 바쁘답니다. 30日부터는 중간고사에 들어갑니다 11月에도 '문학의 밤'이 열릴 계획이랍니다.




  선생님께서 얼마나 바쁘신지 알고 싶은데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사모님이랑은 여전히 행복하실 거구요. 또 귀여운 동생 한 명은 생겼다고 해도 막지는 아니하리라 믿습니다.
  부산에 오시면 연락이라도 해 주십시오. 미형이랑 달려가겠습니다. 저희 집 전화번호(802-××××) 꼭 기억해 두십시오. 미형이랑 선생님 얘기를 곧잘 한답니다. 그리고 저에게 문학책이라도 읽어라고 권하고 싶은 책 있으시면 적어주십시오. 주신다면 어떤 일이 생겨도 꼭 구입해 읽을 테니까요.

  선생님!
  교실에는 텅빈 주인 없는 책상과 의자들만이 가득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혼자랍니다. 아니 선생님과 더불어 대화를 가지니 두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버린 깡마른 나무마냥 감정은 사라져가고 눈물을 잃어가는 서글픔이 더욱 간절히 글을 적게 합니다.

  서정주 선생님의 '푸르른 날에'란 詩가 떠오르는 하늘이 무채색입니다. 벌써 늙어버린 아이마냥 1학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아마도 살아온 생활에 대한 후회일까요?  그러나 후회하고 싶지 않은데도 떠올린 두 글자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선생님과 함께 낭송해보고 싶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를...

  1982. 10. 8.




  <함께 나누기>

  제가 편지는 모아두었지만 편지 봉투를 함께 껴두지 않은 잘못을 범하는 바람에 편지 쓴 사람이 누군지 몰라 참 안타깝습니다.
  다들 편지 봉투에 "ㅇㅇ 보냄"이라고 하지만 편지 속에는 자기 이름 밝히지 않잖아요. 고작해야 "숙 올림" "희 올림"처럼 한 음절로 처리할 뿐.

  이 소녀는 제게 오랫동안 편지 보냈는가 봅니다. 그럼에도 봉투에 이름 남기지 않아 찾을 수 없군요. 이름이 있으면 당시 교무수첩을 보관하고 있어 그 학생 기록 찾아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련만.
  내용은 큰 이벤트는 없으나 문예부 학생답게 묘사와 수식이 아주 뛰어나 보입니다. 제가 읽으나 글벗님이 읽으나 같은 내용이라 덧붙일 얘기가 없습니다. 다만 편지 속 미형이란 이름의 소녀를 찾아봤더니 1979년도 여중 2학년 학생이라 그때 같은 반 소녀라 여길 뿐.

  오늘도 저녁에 워드로 작성하고 있으니 아내가 이러는군요.
  "당신 젊을 때 제자와의 얘기 관심 가지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눈이 더 안 좋아질까 봐 걱정하는 말인지, 질투가 섞인 말인지...



*. 붙임자료는 1980년 당시의 교무수첩인데 안에 아이들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다만 내용은 잉크가 번져 눈을 갖다 대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저분해 스캔 안 했습니다. 이름만 알면 어떤 학생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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