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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10.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70)

제70화 : 중고 인생

@. 오늘은 제가 쓴 생활글(수필)을 배달합니다.



               * 중고 인생 *


  겨울에 밖에 나갈 때마다 즐겨 입는 패딩을 소개합니다. 아주 고급스러운 비싼 옷이 아닙니다. 그냥 편해서 입을 뿐. 제가 하도 덤벙대는 '털팔이'라 옷을 입고 나가면 더럽히거나 찢어지는 경우가 종종입니다. 더러운 거야 씻으면 되지만 찢어지면?
  아내 잔소리 듣기 싫어 더럽혀져도 찢어져도 아깝지(?) 않은 옷이 하나 필요했습니다. 열심히 ‘당근’을 뒤지다 마음에 드는 하나를 구했습니다. 단돈 2만 원. 물건 받고 거기서 입을 때까진 좋았는데 집에 와 보니 좀 작은 듯.

  그래서 아는 이에게 넘기고 다시 검색하다가 이번엔 1만 원짜리 찾았습니다. 그게 바로 겨울에 밖에 나갈 때마다 걸치는 짙은 고동색 패딩입니다. 제가 당근에서 산 옷이라고 말 안 하면 다들 제법 돈 들인 옷으로 여깁니다. 거기서 샀다고 말하는 순간 눈빛이 달라지지만.


(그저께 구입한 아디다스 운동화)



  어제도 한 건 올렸습니다. 운동화가 필요해 뒤적이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아디다스 제품’이라며 올라온 소식 보고 바로 찜했습니다. 받아보니 택(tag)도 붙어있고 정말 새것처럼 보였습니다. 정품을 반값에 샀으니 얼마나 경제적인가요.
  물론 늘 성공만 하는 건 아닙니다. 한 번은 중국제 '임팩 렌치'가 싸게 나와 샀는데 거기서 작동했을 땐 이상 없었습니다. 집에 와서도 잘 돌아갔습니다. 힘도 좋았고 배터리도 이상 없고. 그러다 풀어야 할 일이 있어 되돌렸더니 안 됐습니다.
  허니까 박을 수는 있는데 풀리지는 않는. 쓸 수 없는 물건을 샀으니 무려 4만 원이나 손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임팩 드릴'로 바꿀 수 있는 부속물도 있고 기타 여러 도구들도 담겨 그것만 해도 2만 원 족히 되니 큰 손해는 아닙니다.


  가끔 저를 잘 안다고 하시는 분들이 제가 중고 물품을 즐겨 구입한다고 하면 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평소 ‘까촌남(까칠한 촌남자)’으로 소문난 사람이 더욱 그런 물건에 탐닉하니(?) 신기하다는 표정이지요.


(감을 수는 있으나 풀 수 없는 중국산 임팩 렌치)



  정말 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제 물품 대부분이 중고임을 압니다. 차도 여섯 대 바꾸었는데 생애 최초 구입 차 빼곤 모두 중고차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새로 지었지만 먼저 살던 집들은 중고 아니면 전세, 그도 아니면 오래된 사택이었습니다.
  저와 반대로 아내는 중고라면 질색합니다. 남이 타던 차, 남이 살던 집, 남이 입던 옷, 남이 쓰던 공구... 이런 걸 사들이는 저를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혀를 끌끌 차다가 언젠가는 집에 들여놓기만 하면 다 갖다버릴 거라고 엄포까지 놓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는 말,
  “어차피 지금 우리 나이도 중고잖아. 당신이나 나나 이제 곧 칠순인데 샘삐만 찾고 중고를 멀리 하면 되나?”
  이러면 한바탕 부부싸움이 일어납니다.


(인생 첫 차이자 유일한 새 차였던 엑셀 - 구글 이미지에서)



  그러고 보니 제가 중고에 눈독들인 시점이 아주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대학 다니던 1976~7년 무렵입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과 대구 반월당 헌책방 골목 어지간히 누비고 다녔으니까요.
  거기서 대어를 낚은 적도 있습니다. 당시 소지하기만 해도 바로 감방에 처넣는다고 소문 나있던 월북시인의 시집들. 반월당 한 책방 구석에 박혀 있는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을 보는 순간 ‘됐다!’ 하며 속으로 외쳤습니다.

  책 몇 권을 산 뒤 그 사이에 넣어 계산할 때까지 혹 주인이 눈치채면 어쩌나 했는데 집에 올 때까지 아무 일 없었습니다. 보물(?)을 획득한 뒤 그냥 놔두지 못하고 입이 근질근질하여 학우에게 이야기했더니 얼마 안 지나 현대시 가르치는 교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몇 번이고 돌려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말 못했고, 교수님 역시 돌려주지 않아 사라졌습니다. 이제사 돈만 주면 구입할 수 있는데 (8만 원쯤), 전자책으로도 나왔는데, 인터넷을 통해 볼 수도 있는데...


(구글 이미지에서)



  82년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제주도 갔는데 당시엔 단체여행처럼 버스에 20쌍 정도의 신혼부부를 태우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가이드가 마이크를 돌리며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차례가 왔을 때 무심코 ‘고물상 주인’이라 했습니다.
  아내는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저야 굳이 교사임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직업. 그런데 결혼 후 십 년쯤 지난 어느 날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왜 고물상 주인이라 했는지 알겠다.”고.


  큰 사고가 나지 않거나 중병 말기에 이르지만 않으면 평균 85세까지 산다는 통계가 나왔다 하니 앞으로 15년은 족히 더 살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도 버스 타면 자리를 비켜주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때가 되면 더욱 많아지겠지요. 중고 인생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다만 중고 물품 가운데 쓸 만한 제품이 가끔 있는 것처럼 중고 인생 가운데서도 가끔 쓸 만한 늙은이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깔쌈한 노인으로 늙고 싶은데 잘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늙을수록 가능한 입은 다물되 지갑은 열라고 하건만 그 반대니 참...
  '욕심을 버려라', '베풀고 살아라', '낮은 곳에 눈을 줘라', '늘 웃으며 사람을 대하라'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시간 들여라' ... 좋은 말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으니. 아니면 다음부터 그래야지로 미룰 뿐이니...

  혹시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그 며칠 후라도 길거리에 보따리 들고 있는 사람에게 비밀요원처럼 슬그머니 접근해 말 건네는, 늙수그레하면서도 꾀죄죄한 사내가 보인다면 그게 저일지도 모르니 부디 확인하지 마시고 그냥 지나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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