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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31.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71)

제172화 : 수채와 닮은, 아니 유화 닮은

   * 수채화 닮은, 아니 유화 닮은 *



  그림 배우려 다닌 지 꽤 되지만 좀체 실력이 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연습해야 하건만 게을러서 덜 했기에. 그러니 누가 보면 제법 다닌 시간이 쌓였으니 그림도 웬만큼 그리겠거니 여기겠지만 전혀 아니다.
  하기야 어떤 종목이든 쉬 이뤄지는 게 있으랴. 글 쓰는 일도 그렇다. 초창기에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지금보다 아쉬운 곳이 많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다른 무엇이든 오랜 시간 숙련이 필요하건만 당장 눈에 띄는 성과 보이지 않아 졸갑증만 낼 뿐.

  아직 창작할 능력은 못 돼 전문가가 그려놓은 작품 - 어반스케치 -을 보고 스케치를 할 때까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수채화 물감을 입히면 망해버린다. 다른 분들은 거꾸로 스케치가 어렵지 물감으로 칠함은 재미있고 쉽다 하는데 나는 그 반대다.


(베낀 어반스케치)



  그러다 보니 가능한 물감 입히지 않는 펜 그림(pen-drawing)에 관심이 갔다. 펜 그림을 하고 싶어 덤벼든 게 아니라 물감 때문에 그리 했는데... 하면서 오히려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닌가 했다. 왜냐면 그림 배우는 목적이 풍경화를 그리려 함이 아니라 글에 붙일 삽화 얻을 참이었으니까.
  하도 물감 사용에 고민하니까 한 고수가 일러준다. ‘수채화는 덧칠하면 망하지만 유화는 덧칠해야 살아나니 그쪽으로 나가라.’고. 첫 물감 잘못 사용해도 덧칠해서 만회할 수 있다니. 귀에 솔깃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글 쓸 재료를 발견해서.

  수채화는 덧칠하면 할수록 색이 탁해지고 어두워지기 때문에 수정이 어렵고 망한 작품이 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유화는 물감이 마르고 나면 다른 색으로 덧칠을 할 수 있어 오히려 더 참신한 빛깔이 나온다나.


(베낀 펜그림)



  수채화와 유화를 글감으로 한 글을 쓰면서 문득 우리네 삶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음이 떠오른다. 수채화처럼 맨처음 칠한 빛깔을 고수하듯이 첫 마음먹은 길로 계속 걸어가는 삶. 즉 다른 데 곁눈 팔지 않고 자신이 첫발 디딘 길로 가는 삶.
  아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아들의 대학 전공은 제어계측학인데 첫 직장 들어갈 때 받은 보직이 ‘배터리 분리막’ 관련 일이었다. 처음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옮겼는데 비슷한 일을 한다. 현재의 직장에서 옮길 생각이 없지만 만약 옮기더라도 그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나.

  또 가끔 뉴스를 보면 수십 년 동안 한평생 외길을 걸어온 사람의 외곬수 인생 얘기가 나온다. 하기야 나 같은 교사도 마찬가지다. 한번 교직에 발 디딘 이상 다른 업종으로 바꾼 사람은 극히 드물다. 국어 교사면 퇴직할 때까지 국어 교사로.


(34년간 오직 한 프로그램만 맡은 송해 님)



  헌데 유화의 덧칠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여러 직업을 옮겨 다닌 사람 말고 업그레이드된 변신으로.

  예전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었는데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즉 공학도가 아닌 인문학도였다는 말. 그런 그가 애플사를 설립했고,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IT 기술 정점의 제품 출시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는데 대학 때 배운 철학이 큰 힘이 되었다나.
  또 IT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역시 하버드대에서 심리학과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다. 그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만약 컴퓨터 공학만 배우고 심리학을 배우지 않았으면 지금의 페이스북은 없었을 것이라 하였으니.

  우리나라로 오면 김창옥이란 분을 잘 아실 터. 워낙 강의가 재미있고 유익해 방송에도 많이 나오니까. 그는 성악을 전공하여 성악가로 성공하려다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지만 성악가가 되어 무대에 서는 마음으로 대중들 앞에 선다나.
  배우 한석규 씨는 다 아시다시피 성우였다. 배우가 꿈이었는데 군 생활 당시 포격 훈련을 받다 허리에 부상을 입어 배우 꿈을 접고 성우가 되었다. 그는 성우 신참 때 혹독한 훈련을 받았는데 나중에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 배우로 데뷔한 뒤 성우였을 때의 훈련이 대배우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토로했고.


('소통' 전문가 김창옥 씨)



  글 쓰는 사람에게도 업그레이드된 변신이 있다. 글 쓸 때 대부분 처음 의도를 끝까지 지켜 가려 하지만 아주 가끔 변신에 성공하는 경우.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환기시키는 최초의 페미니즘 작품으로 알려진 입센의 [인형의 집]을 보자.
  입센은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으로 어느 날 아침 배달된 신문 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신문에 가정을 팽개치고 나와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사는 ‘노라’ 닮은 여자 이야기가 실렸는데 처음 그는 그 기사를 읽고 분노했다.

  "이런 나쁜 여자가 있나! 여자라면 모름지기 가정을 지키며 살아야지 어디 바깥생활을 즐겨. 좋아, 내가 글로 이런 여자를 묵사발내야지."
  이렇게 출발했는데 써가면서 입센은 자기도 모르게 ‘노라’ 닮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개하고 말았다.  즉 가정을 버린 못된 여자 노라로 만들려고 했건만 오히려 여성해방의 기수가 되었으니.


([인형의 집] 연극 한 장면)



  아직 달내마을에는 예전 농사짓던 그대로 논과 밭으로 나가는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물론 농기계가 나와 훨씬 수월해졌지만. 우리 집이 마을 맨 윗집이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재 뭘 하고 있는지 다 안다. 굳이 내려다보지 않더라도 해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니까 당연히 알 수밖에.
  오월 중순 마을 들어서면 집집마다 오디 그물이 쫙 깔려 있다. 한창 오디 떨어질 때면 아침저녁으로 뽕나무에 붙어 거둬들여야 하니까. 마을길 한 바퀴 돌다 보이는 밭둑 논둑에 풀이 무성하다 싶으면 이내 다음날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요즘 내게 가장 큰 관심은 그림이다. 밭도 돌보고, 풀도 베고, 오디도 털지만 어떻게 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리느냐에 가장 신경 쓴다. 다만 신경만 쓸 뿐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열매만 거두려 할 뿐 거름 주는 일은 뒷전.
  내가 쓴 글에 내가 그린 그림을 덧붙이면 업그레이드된 참 아름다운 변신이 될 텐데... 아, 치매 예방 차원에서 선택한 단 한 번의 외도가 빛을 볼 날은 언제일까?

  *. 둘째 그림은 스케치로 끝냈고, 첫째 그림은 고수가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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