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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2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24)

제124편 : 김선우 시인의 '봄날 오후'

@. 오늘은 김선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 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ㆍ그ㆍ러ㆍ바ㆍ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년)

  *. 늙은네 : ‘늙은이’를 가리키는 경기도와 강원도 지방 사투리.

  #. 김선우 시인(1970년생) : 강릉 출신으로 1996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시인으로 소설가로 활동.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소리를 곧게 내면서 가끔 매스컴에 오르내림
  (혹 이름만으로 오해할까 봐 남성 아닌 여성 시인임을 미리 밝힙니다)




  <함께 나누기>

  언젠가 차 몰기가 귀찮아 부산 갈 일 있어 버스 탔는데 앞자리에 두 할머니 - 라 하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지만 -가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속삭이듯이 하는 말이라 귀를 쫑긋 세워야 들을 수 있었는데 두 여인의 대사 가운데 나오는 '소개팅'이란 단어가 귀를 끌어당겨 달팽이관에 힘을 주었습니다.
  처음엔 아직 출가시키지 않은 자식 가운데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점입가경! 두 할머니가 부산 사는 한 친구가 소개팅해 준다는 말에 혹해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두 분이 소개팅에 성공했는지, 엄청 즐거웠는지, 그리하여 이차까지 갔는지는 모릅니다. 또 두 할머니에게 남편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소리 아주 낮춰 주고받는 얘기를 통해 알지만)

  시로 들어갑니다.

  먼저 이 시를 드라마로 만든다 하면 등장인물이 셋 나옵니다. 할머니 둘과 두 사람보다 젊은 관찰자인 여성 화자. 공간적 배경은 탑골공원 공중변소, 시간적 배경은 오후 세 시. 상황은 주인공인 두 할머니의 이야기를 변기에 앉아 화자가 몰래 엿들음.
  화자는 우연히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렀다가 화장을 고치고 있는 할머니 두 사람을 봅니다. 조각난 거울을 보며 연지를 곱게 바르고 있는 모습, 아마도 좀 낯선 광경이었겠지요. 그래서 화자의 시선을 끌었을 테고.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이 시구가 시 흐름을 장악합니다. 문맥으로 보아 두 할머니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은근하게 접근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징그럽다?' 징그럽다고 했으니 몹시도 싫다는 뜻인데 사실일까요?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공중변소에 들어와 화장을 고치는데..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화자는 변기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두 할머니 대화를 오래도록 듣습니다. 왜? 재미있어서? 어쩌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뜻밖이기도 한 대사에 화자는 절로 웃음이 일어납니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바람난’이란 시어에서 두 할머니는 다들 집에 할아버지가 계신가 봅니다. 그러니까 유부녀인 셈이지요. 할머니를 두고 유부녀라고 하니 참 어색합니다만 남편 있으니 유부녀가 맞는 말이지요.
  화자는 엄마가 바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바람난 여인처럼 늙어도 자신을 곱게 꾸미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뜻으로. 여자가 할머니 되는 순간 여자로서 정체성을 잃는다고 합니다. 화자는 어쩌면 할머니가 된 엄마가 여자로서 정체성을 되찾기 바라는 뜻도 담았을 겁니다.

  제목 「봄날 오후」를 봅니다.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하면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 하지요. 헌데 이 표현에서 남자 여자라 하면 보통 젊은 남자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합니다. 할머니라는.
  할머니도 화장을 해서 할아버지들의 시선을 끌고 싶어합니다. 할아버지는 말할 것 없겠지요, 할머니들에게 인기 있는 남자가 되고픈. 아, 그런데 나에게는 여태 소개팅이 들어오지 않는데... 눈이 나빠 눈이 별로 높지도 않은데... 들어오면 깔쌈한 곳에 데려가련만... 그때를 대비해 보톡스 맞으려는데...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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