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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10.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30)

제130편 : 임영석 시인의 '의자론'

@. 오늘은 임영석 시조시인의 시조를 배달합니다.


          의자론
                          임영석

  물에게 바닥이라는 의자가 없었다면
  평등을 보여주는 수평선이 없었을 거다
  물들이 앉은 엉덩이 그래서 다 파랗다

  별빛에게 어둠이라는 의자가 없었다면
  희망을 바라보는 마음이 없었을 거다
  별빛이 앉은 엉덩이 그래서 다 까맣다

  의자란 누가 앉든 그 의자를 닮아 간다
  풀밭에 앉고 가면 풀 향기가 스며들고
  꽃밭에 앉았다 가면 꽃향기가 스며든다
  - [꽃불](2018년)

  #. 임영석 시인(1961년생) : 충남 금산 출신으로 1985년 [현대시조]를 통해 등단. 고졸 후 첫 직장인 <만도기계>에 들어가 노동과 시조 쓰기 두 가지를 함께 해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원주에 살면서 시를 씀.




  <함께 나누기>

  오늘 뽑아낸 작품은 누가 봐도 3연으로 된 시조입니다. 고시조의 율격에 한 점 어긋남 없는. 오히려 '구별 배행 시조'나 '음보별 배행 시조'가 판을 치는 현대시조에서 이런 작품은 보기 드문 편입니다.
  함에도 읽다 보면 고시조와 완전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자연을 노래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유시의 함축성과 상징성을 많이 지녀 퍼뜩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조로 들어갑니다.

  오늘 시조처럼 의자를 글감으로 쓴 시가 제법 됩니다. “지금 어드메쯤 /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 그분을 위하여 /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로 유명한 조병화 시인의 시 말고도, 김기택 시인의 「낡은 의자」, 이정록 시인의 「의자」 등. 이 말은 의자가 시의 글감으로 알맞다는 뜻이겠지요.
  시에 쓰인 의자 대부분은 의자의 기능, 즉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일을 보거가 쉬는 자리로 썼습니다만 오늘 시인의 의자는 조금 다릅니다. 일단 의자에 앉는 존재가 사람이 아닙니다. 1연에선 물이 앉고, 2연에선 별빛이 앉고, 3연에선 풀이나 꽃이 앉습니다.

  제1연으로 갑니다.
  “물에게 바닥이라는 의자가 없었다면 / 평등을 보여주는 수평선이 없었을 거다”

  물은 아래가 비어 있으면 끝까지 내려갑니다. 만약 물이 가운데가 빈 채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윗부분에서 수평 상태가 무너질 겁니다. 왜냐면 계속 아래로 내려가려는 물의 특성 때문에 수평이 흔들리고 말 테니까요.
  이런 물의 단순한 원리 말고 시인이 담으려고 속뜻은 뭘까요? 사람은 누가 어떤 길을 걸어왔던 물처럼 수평선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저는 이를 ‘평등’으로 봅니다. 아래엔 움푹 파여 쌓인 게 많더라도 위를 보면 똑같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아무리 쌓였더라도 말이지요.

  제2연으로 갑니다.
  “별빛에게 어둠이라는 의자가 없었다면 / 희망을 바라보는 마음이 없었을 거다”

  1연에서의 ‘바닥’과 2연에서의 '어둠'은 다른 말이지만 추구하는 바는 같다고 봅니다. 바닥이 있기에 평등이 있고, ‘어둠’이 있기에 희망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바닥과 어둠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평등과 희망을 이끌어내는 긍정적인 시어로 봐야겠지요.

  제3연으로 갑니다.
  “의자란 누가 앉든 그 의자를 닮아 간다”

  어디서 비슷한 내용을 들은 적 있지 않습니까? 같은 종이라도 향을 싼 종이에선 향기가 생선을 싼 종이에선 비린내가 난다고 한 고사(古事). 정부 인사가 발표되면 언론에선 이런 말을 하지요. '어떤 자리가 중요하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앉느냐가 중요하다'라고.
  잠시 앉았든 오래 앉았든 구린내보다 좋은 향기를 풍기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풀밭에 앉았다 간 것처럼 풀 향기가 스며들고, 꽃밭에 앉았다 간 것처럼 꽃향기가 스며드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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