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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l 05. 2024

목우씨의 산골일기(174)

제174화 : 전주지 마라

@. 오늘은 제가 쓴 생활글(수필)을 배달합니다.



            * 전주지 마라 *


  중고생들이 교복 입고 이름표 붙이고 다닐 때 유행하던 개그다.

  한 남학생의 이름이 '신중'이었다. 할아버지가 그 학생의 아버지가 너무 덤벙대 재산 손실 가져오는 행동을 하도 해서, 손자만큼은 제 아버지를 닮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하며 살라는 뜻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나름 의미 있는 이름이 아닌가.
  그런데 이 학생이 등하굣길에 버스 타면 사람들이 그의 이름표를 보고 킥킥 소리 내 웃는 게 아닌가. 얼굴 한 번 보고 이름표 한 번 보면서... 그때마다 신중이는 얼굴만 붉힐 뿐 달리 변명도 못하고. 불행히도 신중이의 성이 '임'씨였다. 그러니 이름표엔 '임신중'




  지난해 여름 아침, 마을 한 바퀴 도는데 저쪽에 전전 이장 하시던 운곡 어른께서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는데 고추가 이상했다. 쭈그러들고, 누렇게 뜨고, 돌돌 말리고...

  단번에 탄저병 걸렸음을 알았다. 그런데 이분은 전문 농사꾼, 그런 병에 걸려선 안 되는 분 아닌가. 약 치지 않는 우리 텃밭엔 일반 고추는 심지 않고 '아삭이고추'만 심는다. 아삭이는 탄저병 위험이 적으나 일반고추는 약 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걸리니까.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운곡 어른께서,
  “아, 내가 너무 전주다가...”
  이해가 안 돼 계속 바라보자 그제사 자세히 설명하는 게 아닌가. 어른의 말씀을 종합하면 이렇다.

  원래 약 치려고 준비해 놓았는데 약 치는 다음 날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온다고 해 비 그친 뒤 치려고 미뤄놓았단다. 아시다시피 약 친 바로 다음 날 비 오면 다 씻겨 내려가기에 효과 없으니 비 그친 뒷날 치는 게 맞다.
  그래서 그날은 울산 아들네 집 갔다 왔는데 정작 당일엔 비 오지 않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비가 오는 바람에 며칠 늦게 약을 쳤더니 이미 병에 걸린 다음이었다나. 그러니까 어른께서 약 칠 시기를 ‘전주다’가 때를 놓쳐 고추에 병이 들었다는 말씀.


(탄저병 걸린 고추)



  ‘전주다’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것저것 일일이 따져 계산해 본 뒤 행동하다’는 뜻이며, 너무 신중하게 생각해 미루다가 놓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자어인 ‘신중하다’와 비슷하면서도 ‘손익을 꼼꼼히 따져 계산하다’란 측면이 더해진 말이다.
  우리는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실수를 예방하는 등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그러나 너무 전주다가 놓친 경우도 여러 번이다. 충분히 생각한 뒤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2019년 11월 코로나란 말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초등 동기들과 함께 한 ‘중남미 여행’을 ‘전주었다면’ 그때 그 추억은 지금 상상으로만 남았으리. 왜냐면 두 달 뒤 코로나가 왔으니까. 개인의 일도 이럴진대 사회와 나랏일은 더욱더 그럴 터. 철저한 준비 뒤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되면 바로 즉시 밀고 나가야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때 살 시점과 팔 시점을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너무 성급해도 문제가 있지만 너무 전줘도 탈이 난다. 한 번쯤 대범해야 할 때 전주다가 실패해 본 사람들은 잘 알리라. ‘신중’이 일을 그르치게 할 수 있음을.

  기업도 그렇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당장 실행해야 할지 미뤄야 할지 판단 여부로 기업 발전을 이루느냐 퇴보하느냐가 갈리니까. 개인과 기업일이 이럴진대 나랏일은 두말할 나위 없을 터.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시점에서 너무 전주다가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마추픽추)



  몇 년 전부터 새해에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왜냐면 육십 후반이면 언제 갈지 모르는데 따로 계획 세운들 이루기나 할 것인가. 그러다 올해 계획을 몇 개 세웠다. 언제 갈지 시간 정해져 있지 않다면 계획 안 세운다고 나은 일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전원주택 사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일 가운데 집에 투자하지 말고 외부 조경에 투자해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즉 건축물에 돈 들이지 말고 주변 환경 조성에 힘쓰라는 말. 그래서 올 정초에 뜻을 세웠다. 들어오는 입구 무지개문 보강하는 일과 돌담 쌓는 일.

  우리 집 입구 무지개문 위로 키위와 능소화가 덩굴을 이루어 덮고 있다. 처음엔 쇠기둥 두 개로 지탱하기 충분했다. 헌데 키위가 부풀고 능소화도 덩치 커져 아무래도 지탱하기 어렵다 여겨 기둥 몇 개 더 늘려야겠다고 여겼다.


(원래의 무지개문엔 오른쪽은 키위, 왼쪽은 능소화가 자랐으나 현재는 무지개문이 넘어져 없어짐)



  그래 계획이었다, 실행이 아닌.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5월 중순 거센 바람 부는 날, 키위와 능소화 담은 문이 기어코 넘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사람도 차도 지나가지 않는 시점. 게다가 태풍 불 때도 홍수 날 때도 아니었으니.
  결국 전주다가 낭패 본 셈이다. 진작 각관 사서 기둥 세우고 무지개문 보강했으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건만. 돌담 쌓은 일은 사고와 관계없고 미관과 관계있으니 굳이 빨리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허나 미루면 될 일도 안 된다.

  그걸 눈치챘는지 아내가 한마디 한다.
  “한다 한다 한지 천 년, 또 어느 천 년 기다려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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