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물 없는 계곡에 눈먼 선녀가 목욕을 해도 지게꾼에게 옷을 물어다 줄 사슴은 없느니라 아무도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갈 일이 없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오른들 더 이상 삭은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느니라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이 땅엔 더 이상 여의주 없음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삼급수에서 비닐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아울러, 덧없이 붉은 네온을 깜박이는 자들이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한다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 중이니 절대 교회 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너희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할 때 눈을 뜨리라 -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2001년 초간, 2012년 복간)
#. 반칠환(1964년생) :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번득이는 기지(機智)와 남다른 기품이 버무려진 시를 쓴다'는 평을 들으며, 현재도 열심히 시를 쓰고 시 해설을 쓰면서 ‘숲생태 전문가’로도 활동.
<함께 나누기>
옛날 어른들은 거짓말을 많이 지어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믿었지요. 우리나라에선 달에는 옥토끼가 살면서 심심하면 방아 찧는다고 했고, 서양에서는 산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날 루돌프라는 코 빨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지붕의 굴뚝을 타고 내려와 선물을 내려놓고 간다는 내용을. 달에 옥토끼가 산다는 이야기는 아폴로 11호가 55년 전 1969년 7월20일 달에 첫 발자국을 찍으면서 어떤 동물도 살 수 없는 곳이란 말에서 끝났습니다. 산타클로스 할배의 얘기도 초등학교 들어오면서 제 또래들과 얘기를 나누다 지어낸 얘기인 걸 알게 됩니다.
이어집니다. 독일의 그림 형제가 쓴 [그림 동화]에 나오는 신데렐라 이야기. 나중에 알아보니 원작은 전혀 내용이 다르다지요. 원작은 낭만적이기보다 잔혹한 내용이라지요. 그래서 ‘잔혹동화’의 예로 자주 거론된다는. 이렇게 파고들면 순수했던 우리 꿈들이 무너집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첫 시행부터 충격을 줍니다. ‘달에는 토끼는 살지 않는다.’ 어린이들의 모든 아름다운 상상을 무너뜨리는 표현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폴로 11호 이전에 이미 탐사 통해 드러났다시피 달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린 부정하고 싶습니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들에겐, 특히 남성에겐 물 없는 계곡에 어여쁜 선녀가 목욕을 해야 하고,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는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동화는 성립합니다.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갑자기 한 연이 지나면서 내용이 확 바뀝니다. 다분히 풍자적인 내용으로. 가난한 집에 박씨를 물고올 제비는 없습니다. 다 아시겠지요, 한 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로, 한 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로. 신분이 바뀌지 않습니다, 절대로.
“삼급수에서 비닐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뜨끔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 시가 예사로운 시가 아니라 대단한 비틀기(풍자)의 시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절대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습니다. 미꾸라지가 용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전 모 교육행정관의 말처럼 ‘왕의 DNA를 타고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다릅니다.’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그래서 시인은 외칩니다. 헛꿈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을 꾸게 만드는 동화는 출판해선 안 된다고. 어린이들에게 꿈을 갖게 해선 안 된다고. 참으로 뜨끔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줘야 한다고 하고선 얼마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줬는지요?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 중이니 / 절대 교회 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절대자인 하느님도 부처님도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슬쩍 자리를 피합니다. 대단한 비틀기이지요. 하느님도 부처님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약하디 약한 인간이 어떻게 만들라고.
*. 풍자적인 시를 읽을 때마다 뜨끔합니다. 마치 저를 노리는 듯해서. 혹 나랑 아무 관계 없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그냥 지나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