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충규 시인(1965년 ~ 2012년) : 진주 출신으로 1998년 [문학동네] 통해 등단.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낙타를 글감으로 한 시를 많이 써 ‘낙타시인’이란 별명을 얻음
생전에 출판사 [문학의 전당] 대표를 역임했고,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도 맡음
<함께 나누기>
수업 중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으면 일부러 우스개를 꺼냅니다. 제가 꺼낸 우스개는 모두 ‘아재개그’ 류이니 끝나면 재미없다고 난리입니다. 그럼 이리 말하지요. ‘너희들이 나의 개그 싫어하니 다시는 하지 않겠다’. 그러면 또 이리 답합니다. ‘재미없어도 좋으니 계속해 달라’고.
‘바닷물빛이 왜 퍼런지 아니?’ 하고 묻습니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답합니다만 제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파도가 바닷가 바위에 부딪혀 멍이 들어서 그런 거잖아.’
다음 또 묻습니다. ‘그럼 바닷물은 왜 짤까?’
역시 여러 답이 나옵니다만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물고기들이 날마다 오줌 싸니까 짜지 않겠어?’
시로 들어갑니다.
“무시로 무너지는 멍든 하늘을 / 견뎌내느라 물은 퍼렇다 멍이 / 가실 날 없다”
‘멍’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심하게 두들겨 맞거나 어딘가에 부딪혀 살갗 속에 퍼렇게 맺힌 피멍. 하늘이 멍들었다 합니다. 세상살이 힘들게 흘러간다는 뜻을 포함하는 표현인 듯.
“물고기의 몸에 있는 자잘한 반점도 /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자국이다”
시인의 관찰력이 참 돋보입니다. 물고기 가운데는 자잘한 반점을 지닌 녀석이 제법 많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열목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진 참조) 물고기의 이 자잘한 반점도 멍든 물속에 살다 보니 얻은 멍의 흔적이랍니다.
만약 이 시에서, 물고기를 사람으로 물속을 '사회'로 대치하면 우리 사람도 멍을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멍을 안고 있으니까요.
“물을 내려다볼 때마다 / 아무 생각 없이 멍해지는 자 / 그의 몸에도 멍이 자라고 있다”
멍을 앞에서 ‘심하게 두들겨 맞거나 어딘가에 부딪혀서 생긴 피멍’이라 했는데 여기선 또 다른 멍의 뜻이 나옵니다. 정신이 몸을 빠져나가 멍하니 앉아 있다 할 때처럼 쓰는 멍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멍은 ‘들어오는 멍’과 ‘나가는 멍’ 둘로 나눠집니다.
“제 생애를 멍에처럼 짊어진 자들이 / 자주 물가에 홀로 나와 멍해진다”
요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물멍이 아니라 삶의 낙을 잃고 쫓기듯이 집을 나와 물가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물멍입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나 참 팍팍한 삶인 듯. 앞에서도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음을 표현했는데 거듭 씀을 보니 시인의 운명인 듯.
“멍든 자는 결코 동행하는 법이 없다 / 제 몸속의 멍을 소멸시키려고 / 멍이 가득한 물속으로 뛰어드는 자도 있다”
우린 가끔 기쁨을 함께 나누면 배로 불어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배로 줄어든다는 말을 합니다. 헌데 화자는 동행할 이가 하나 없습니다. 절대고독의 처지에 놓인 듯. 그래서 멍이 가득한 물속으로 뛰어든다는 표현을 했겠지요.
“죽음이 그를 소유할 때 / 그가 가진 멍은 비로소 소멸되는 것이다”
가슴속 쌓인 멍은 좀체 없어지지 않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멸된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 살았을 때 조용하던 소식들이 죽고 나면 물결이 앞장서 그의 주검을 멀리 있는 다른 세상에까지 전해줍니다.
요즘 별의별 대회가 다 열립니다. '멍 때리기 대회'도 있다고 하니까요. 왜 이런 요상한 대회가 열릴까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안 긴장, 억압 스트레스의 연속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날아오는 스트레스에 가슴의 멍이 점점 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