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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12.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19)

제219편 : 장옥관 시인의 '비명'

@. 오늘은 장옥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비명

                        장옥관


  늦은 귀가

  갑자기 어디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헛디딘 발바닥을 뚫는 대못처럼 뾰족한 그 무엇이 순간, 등뼈를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이 얹혀졌다 4차선 도로가 일제히 출렁이고 거센 빗발이 솟구쳤다


  희미한 전조등 불빛에 드러난 것은 허리가

  반쯤 꺾인 누렁개 한 마리

  반사적으로 일어난 놈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인도 쪽으로 죽자고 내달았다

  짝이 맞지 않는 네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아스팔트에 묻어 있는

  비명을 깔아뭉개며 나는 더욱 세차게 차를 내몰았다

  앞차가 가졌을 뭉클한 감각이

  그대로 내 바퀴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화물칸에서 떨어진 나무토막이 아니다 그것은, 길바닥에 흔히 짓뭉개져 있는 도둑고양이의 머리통도 아니다 살아 있는 감각과 무엇보다 그 찢어지던 비명!


  나는 나의 컴컴한 지하실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꽃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2023년)


  #. 장옥관 시인(1955년생) : 경북 선산 출신으로 1987년 [세계의문학] 통해 등단. 중학교 교사, 기업체 홍보과 근무를 거쳐, 계명대 문창과 교수로 근무하다 정년퇴직




  <함께 나누기>


  어제 마을 한 바퀴 길에 동물들의 사체를 발견했습니다. 모두 ‘차량동물사고(‘로드-킬’의 우리말)’ 당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는 사시사철 빠지지 않고, 요즘 자주 보이는 동물은 뱀입니다. 뱀은 한창 살 찌운 뒤 겨울잠 자러 이맘때 땅속 들어가려다 봉변을 당한 듯.

  길고양이가 차에 받혀 죽은 장면은 자주 보지만 떠돌이개가 받힌 모습은 참 보기 드문데 시인은 그걸 보았나 봅니다. 아니 ‘보았다’가 아니라 앞선 운전자가 친 뒤 자기도 치었습니다. 그 당시엔 살아있었으나 끝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칠 뻔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야생동물을 치진 않았습니다만 그 직전까지 여러 번 갔습니다. 산길을 달리다 앞에 굽돌이길이 나오면 긴장합니다. 길이 굽어져 있어 앞이 안 보이니까요.

  그땐 무조건 속력을 멈춰야 하는데 익숙한 길이라며 그냥 달립니다. 원래 아는 사람이 더 덤벙댄다고 하지요. 비록 내가 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앞차가 동물을 쳤다면 도로 한복판에 치인 동물이 있을 터. 그러면 2차 가해가 이어집니다.


  차 모는 사람에게 몇 가지 위험한 상황은 ‘밤’ ‘낯선 길’ ‘비’라고 하지요. 그럴 땐 무조건 속력을 줄여야 함에도 자기 운전 실력만 믿고 마구마구 달립니다.


  “헛디딘 발바닥을 뚫는 대못처럼 뾰족한 그 무엇이 순간, 등뼈를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이 얹혀졌다”


  발바닥을 뚫는 대못 같은 뾰족함. 등뼈를 훑고 지나가는 써늘함. 이 둘의 쓰임이 참 절묘합니다. 거기에 ‘4차선 도로가 일제히 출렁이고 거센 빗발이 솟구쳤다’가 이어짐도.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 밟았지만 너무 늦게 밟은 듯.


  “희미한 전조등 불빛에 드러난 것은 허리가 / 반쯤 꺾인 누렁개 한 마리”


  화자를 써늘하면서도 긴장하게 만든 정체가 드러납니다. 허리가 반쯤 꺾인 누렁개. 그렇습니다. 차에 치였다는 말이지요. 저 정도 되면 당장은 살아 있을지 모르나 제대로 된 치료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거기에 집개나 반려견이 아닌 떠돌이개로 보이니.


  “반사적으로 일어난 놈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 인도 쪽으로 죽자고 내달았다 / 짝이 맞지 않는 네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일어났다니 즉사하진 않았다는 뜻이나 짝이 맞지 않은 네 다리를 허우적거렸다는 표현에서 잠시 숨을 참습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짝이 맞지 않는 네 다리’ 읽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여기서 ‘죽자고’의 쓰임이 참 묘합니다. 실제로 차에 치인 누렁이는 ‘살자고’ 인도로 내달았는데 ‘죽자고’라 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읽는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린 ‘죽자고’가 여기선 ‘온 힘을 다하여’란 뜻임을 잘 아니까요.


  “아스팔트에 묻어 있는 / 비명을 깔아뭉개며 나는 더욱 세차게 차를 내몰았다”


  바로 이 순간 의문이 들 겁니다. 최소한 내려서 차에 치인 누렁이가 어떻게 되었을까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 운전자’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혹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대한 두려움으로 속도를 높였다고.


  “앞차가 가졌을 뭉클한 감각이 / 그대로 내 바퀴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앞차가 먼저 치고 다음 화자가 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화자는 두려웠을 겁니다. 살기 어렵다고. 아니면 먼저 친 사람은 내가 아니기에 ‘나는 아무 잘못 없다’, 그러니까 누렁이가 어떻게 되든 나는 그 사건과 무관하다?


  “나는 나의 컴컴한 지하실을 들여다보았다 / 검은 꽃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나의 컴컴한 지하실’은 ‘내 마음속’을 비유한 표현으로 보이며, ‘검은 꽃’은 나쁜 마음이나 감추고픈 죄의식을 말함이 아닐까 합니다. 비유의 표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불편함도 있지만 그 속뜻을 헤아려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밤 빗길에 인간이 모는 차에 치여 죽어가면서도 인간이 만든 도로 즉 인도를 향해 죽자고, 맞지 않은 네 다리를 놀리며 달려 나간 누렁이가 아마도 오랫동안 화자의 마음속에 남아 아픔을 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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