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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산골일기(194)

제194화 : 묵나물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

* 묵나물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 *



엊저녁 밥상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국 쪽으로 눈을 주니 쑥국 아닌가. 한 입 떠 넣으니 맛도 맛이지만 알싸한 쑥 향기가 입안 가득 맴돈다. 아내에게 무심결에 벌써 쑥이 나왔나 하고 물으려다가, "야, 쑥국 직이네. 언제 뜯은 쑥이야?" 하니, 작년 봄에 뜯은 쑥이라 한다.
'요즘이 아니고 작년 봄?' 하기야 지금 쑥이 나올 리 만무. 가끔 마을 한 바퀴 길에 들녘에 눈 주건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혹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들면 쑥은 몰라도 나생이(냉이) 달롱개(달래)는 어쩜 볼 수 있을지도.

누군가 마트에서 쑥 나온 걸 봤다고 하던데 거기 시설 재배(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재배) 공간이 따뜻하니 혹 머리 내민 걸 뜯어오면 가능할지도. 그러니까 정상적인 논둑 밭둑에선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럼 우리 집 밥상 위의 쑥국은? 철을 무시하고 나온 게 아니란 말이다.


b_542Ud018svc1ejqtuz8l0cgs_149gk0.jpg?type=e1920_std (쑥국 말고도 배추쌈, 취나물 무침, 산초잎 무침, 다래순 무침, 무말랭이 고춧잎 무침 등이 섞인 밥상)


그러고 보니 밥상에 오른 반찬 중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게 쑥국만이 아니다. 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다. 다래순 무침, 제핏잎 무침, 취나물 무침, 무말랭이와 고춧잎을 버무린 무침도 보인다.

한 마디로 밥상은 '묵나물 모둠'이다. 나물을 워낙 좋아하는 식성 때문에 아내가 배려한 상차림. ‘쓴 나물 데온 물이 고기도곤 맛이 있어(쓴 나물로 만든 따뜻한 국이 고기보다 맛이 있어)’란 고시조를 들먹이지 않아도 나는 진짜 나물이 고기보다 더 맛있다.


'묵나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해 봄에 뜯어 (살짝 데친 뒤) 말려 뒀다가 신선한 나물이 나오지 않는 겨울에 먹는 산나물'로 돼 있다. 거기서 묵나물의 어원을 대충 찾을 수 있으리라. 아무래도 '오래 두고 묵혀 먹는 나물'이란 데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b_642Ud018svc1prbiohn3cmh_149gk0.jpg?type=e1920_std (왼쪽 무말랭이와 고춧잎 버무리, 오른쪽 제핏잎 무침)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봄날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나물을 뜯어 반찬으로 해 먹었다. 고기가 귀한 시절에야 양반들에겐 아니겠지만 서민에게 봄나물만큼 향기롭고 맛있는 게 어디 있었을까?
허나 아무리 맛있는 나물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 지나면 물리게 마련, 그래서 오래도록 먹기 위해 꾀를 낸 게 바로 묵나물이다. 묵나물을 만들 나물은 따로 정하지 않고 산나물이면 다 되었다. 한 가지 종류만 뜯어 말려도 되고, 둘 이상 섞어 말려도 됐다.
(참고로 가장 흔하면서도 만들기 수월한 묵나물 감은 다래순이다. 산골에서야 아주 흔한 다래덩굴이니 뜯어다 살짝 데쳐 말리면 그걸로 끝)

묵나물 만들기는 일손도 별로 가지 않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으니 우리 어머니들 삶의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으리라. 처마 밑에 널어 말리다가 어느 정도 마르면 소쿠리에 담아둔다. 그걸 볼 때마다 어머니들은 흐뭇했으리라. 겨울 반찬으로 별미였으니.


b_742Ud018svc15ipvuwrgbsc8_149gk0.jpg?type=e1920_std (취나물 무침)



헌데 묵나물은 '묵은'의 의미가 들어 있어 햇나물보다 좀 덜 사랑받는 것 같다. '묵은'이란 접두어에 담긴 ‘케케묵은’이란 의미 때문에. 그러나 묵나물은 햇나물에 비해 맛과 향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햇나물이 나오기 이전, 나물이 귀한 이즈음엔 그 맛이 유별나게 느껴진다.


우리말 중에 '묵은'이란 말이 붙는 낱말이 여럿 있다. '묵은 김치', '묵은 된장', '묵은 세배(섣달그믐날 저녁, 그 해를 보내는 인사로 웃어른에게 하는 절)' 등. 이런 말은 그래도 대체로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저치는 묵은 사람이야!' 할 때는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는 '새 사람'이 아니라 '묵은 사람'이다. 전엔 그런 평가가 못마땅했지만 이젠 나이도 의식도 묵은 사람 아니다 할 수 없어. 해도 관계치 않으련다.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늘 변해야 하겠다는 마음만은 지니기에.


b_842Ud018svcacso1li3yrx2_149gk0.jpg?type=e1920_std (왼쪽은 다래순 말린 걸 물에 풀어 건졌을 때라면, 오른쪽은 다래순 무침)



문득 '장은 묵은 장맛이 좋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이 속담엔 오래된 장이 새 장보다 나은 점만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친구도 오래된 친구가 좋다는 뜻이 더 강하다. 한때 맥주 광고 가운데 ‘친구는 역시 옛 친구’란 문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러고 보니 묵나물은 주로 한 해 지날 무렵에 먹는다. 묵나물 먹으며 그리운 옛사람과 묵은 친구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요즘 친구 만나기가 참 그렇다. 어딘가 한 곳은 다 고장 나 날짜 맞추기도 그렇고, 팍팍한 세태가 그렇고.

올해는 제발 자주 만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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