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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74)

제274편 : 장석남 시인의 '번짐'

@. 오늘은 장석남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년)

#. 장석남 시인(1965년생) : 인천 덕적도 출신으로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재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특이한 경력으로 박철수 감독의 불교영화인 [성철]에서 ‘성철 스님’ 역을 맡음
내일(목) 배달할 장석주 시인과 이름이 비슷한데 혼동 마시길. 두 분 다 이름난 시인이라 더욱 헷갈리기 쉬움.




<함께 나누기>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은 모두 바이러스를 통해 옮아갑니다. 그러니까 바이러스는 참 나쁜 녀석입니다. 헌데 요즘 좋은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웃음 바이러스'. 한 사람의 웃는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로 '번져가' 행복을 전달해 줍니다.
번짐, 시어로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시어 그 자체를 파고들어 걸작이 된 시가 꽤 되는데, 이를테면 이병률의 '스미다', 김승희의 '그래도', 박노해의 '아직과 이미 사이'...

번짐, 어릴 때 붓글씨 쓰려 습자지에다 먹물 묻혀 쑥 그으면 종이에 빨려들 듯이 번져가던 그 까만 세포들의 자글자글한 움직임.
번짐, 봄에 활짝 핀 목련꽃이 번져 사라지면 이내 여름이 되고, 그 꽃이 사라져 그 자리가 열매로 번지면 가을이 됩니다.

"너는 내게로 /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집니다"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즉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바로 이게 사랑이겠지요. 그래서 사랑은 번짐입니다. 번짐은 번져가고자 하는 쪽에서의 움직임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쪽에서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살아 있는 나뭇가지는 잘 휘어지나, 죽은 나뭇가지는 휘어지지 않고 대신 부러집니다. 달리 말하면 살아 있는 영혼은 잘 번지나, 죽은 영혼은 잘 번지지 않습니다. 웃지 않는 얼굴을 보시면 근육이 죽어 있습니다. 죽은 근육은 아무리 재미난 우스개를 들어도 웃음이 잘 번지지 않습니다.

"번짐, / 번져야 사랑이지 /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사랑은 번짐입니다. 번짐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나아갑니다. 밀어내고 부드럽게 떠나고 밀려들어오는, 그 '어쩌지 못하는' 사랑. 스밈과 어울림, 나눔도 그렇습니다. 스며야 번지고, 어울려야 함께 환해집니다. 그렇게 번져야 사랑으로 이어지니까요..

오늘 이 시를 읽은 분들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번지면,
그 번짐이 곁의 소중한 사람에게로 번져가면,
그래서 온 누리로 번져 꽃을 피우면...

번짐, 참 고운 말입니다.



*. 사진은 시와 관련 없습니다만, 이런 사진 보면 절로 미소가 얼굴에 번지지 않을까 하여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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