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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이야기(5)

제5편 : 서동요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08. 2025

  ♤ 향가 이야기(5) ♤


     - 제5편 서동요(薯童謠) -


  서동요는 최초의 향가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향가이기도 하지요. 특히 SBS 창사15주년 대하드라마 (2005년 9월 5일 ~ 2006년 3월 27일) 방영되는 바람에 더욱 우리들 관심 속에 들어왔습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는 그 노래가 나오게 된 배경설화가 있습니다. 따라서 배경설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그 향가를 알 수 있겠지요. 예전 고교 다닐 때 다 배우셨겠지만 「서동요」의 배경설화를 요약해 봅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백제 제30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마(署)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간 아이’란 뜻의 서동(薯童)이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에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머리를 깎아 중의 형색을 하고 신라의 서울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그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자 자신이 지은 동요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서동요」다. 그런데 이 노래의 내용이 대궐에 알려지자 왕은 몹시 화가 나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가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보좌하겠다고 하여 함께 가다가 정이 들어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 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우리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이에 서동이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금을 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즉시 보내자, 왕이 그의 신비한 능력에 탄복해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그 뒤 백성의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그럼 서동이 선화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기게 만든 노래를 한 번 봅시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밤에 알을 안고 가다)"

  넉 줄로 된 노래(4구체)이지만 「서동요」에 대한 논란도 가장 많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근거 있는 얘긴가? 둘째, 서동은 누군가?
  일단 역사학계에서는 백제 무왕과 진평왕의 딸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동요」가 불렸으리라 짐작되는 서기 600년을 전후해 백제와 신라 관계는 개와 고양이 사이만큼이나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용맹했던 성격의 백제 무왕은 수십 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고, 재위 기간 내내 신라 노비의 손에 무참하게 죽은 할아버지 성왕의 복수를 하는데 열중했으니까요.


([삼국유사] 서동요 기록.  왼쪽 첫째 줄 "善花公主" 부터임)([삼국유사] 서동요 기록.  왼쪽 첫째 줄 "善花公主" 부터임)


  그러면 무왕과 선화공주의 맺어짐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서동은 누구일까요? 여기에 몇 개의 학설이 오르내립니다.


  첫째, 무왕이 아니라 백제 부흥을 일으킨 ‘무령왕’이다. 특히 익산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의 기해(己亥)년 명문은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된다는 견해,
  둘째, 실제 두 나라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진(결혼동맹) 백제 동성왕 때의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로 추정하는 견해,
  셋째, ‘서동’ 이 원효의 어릴 적 이름 ‘서당(薯幢)’ 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원효'와 '요석공주'의 관계로 추정하는 견해,
  넷째, 불교에서 말하는 '남순동자'와 관음보살의 관계로 추정하는 견해,
  다섯째, 무왕은 진짜 무왕이지만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백제 당시 좌평 벼슬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 '사택왕비'라는 견해,
  여섯째, 서동은 실존 인물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자 의미 그대로 산마를 비롯한 약초와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소년 무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견해,

  이렇게 다양하게 추정하고 있으니 무왕이 누구냐(또는 선화공주가 누구냐)에 따라 그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 복원된 익산 미륵사지석탑.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명문에 무왕의 부인이 사택왕비라는 기록이 나왔다 함)(새로 복원된 익산 미륵사지석탑.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명문에 무왕의 부인이 사택왕비라는 기록이 나왔다 함)


  내용을 살펴보면 또 이해 안 되는 구절이 있을 겁니다.
  ‘선화공주가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남자인 서동이 여자인 선화공주를 안고 간다고 하면 문제가 없지만. 그래서 어떤 이는 여성상위시대를 보여주는 증거라 했고, 또 어떤 이는 당시 사회의 성문란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또 기존에 ‘몰래(卯)’라 번역했던 향찰이 실제로는 ‘(불)알(卵)’을 가리키며 ‘안고’를 ‘주무르고’로 해독하여, ‘선화공주가 밤에 서동의 불알을 주무르고 간다’로 해석하여 노골적인 성행위를 나타내는 노래라고도 했습니다.


(부여 소재 "서동요 역사관광지")(부여 소재 "서동요 역사관광지")



  다음 서동이 선화공주를 자기 처로 삼기 위해 궁궐 밖으로 쫓겨나도록 만든 「서동요」같은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즉 의도적으로 어떤 목적을 갖고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를 '참요(讖謠)'라 합니다.
  대표적인 참요로 고려말에 불려진 '목자득국요(木子得國謠)'를 아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 노래는 고려말 이성계 무리가 민중에게 불러 퍼지게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木 + 子 = 李’가 되고 ‘得國’이 '나라를 얻다'이니, ‘이씨가 나라를 얻다(왕조를 열다)’란 뜻이 되니까요.
  (나중에 이 노래는 사실 이보다 훨씬 전 '이자겸의 난' 때 불렸다고 하여 엉터리 이론이란 설도 있음)

  또 갑오농민학쟁 때 불렀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도 마찬가집니다. ‘파랑새’는 파란군복을 입은 왜군을 가리키고, ‘녹두’는 키가 작고 몸집이 작달막했던 전봉준을 가리키고, ‘녹두밭’은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이고, ‘청포장수’는 조선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늘 문득 서동요를 생각합니다. 서동이 누구고 서동이 선화공주에게 안겨갔는지,  선화공주가 서동 불알을 주무르고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아직 우리 민족 가슴에 새겨진 노래라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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