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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87)

제287편 : 김선굉 시인의 '그해 겨울'

@. 오늘은 김선굉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그해 겨울
김선굉

내 고향 청기마을 앞에는 참 이쁜 동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참말로 이쁘게 흘러가는 시냇물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여러 해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젊은 어머니는 동천에 가서 빨래를 했습니다.
얼음이 엷게 언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툭툭 얼음을 깨면,
그 아래로 맑고 차가운 냇물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시린 손을 달래며 서둘러 빨래를 하고 일어서려는데,
무슨 일인지 일어서지지 않았습니다.
빨래를 하는 사이 물에 잠긴 치마가 얼어붙은 것이었습니다.
방망이로 얼음을 툭툭 깨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에 붙은 얼음조각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겨울 하늘처럼 맑고 고와서,
조금 빨리 걸으면서 그 소리를 들어도 보고,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그 소리를 들어도 보았습니다.
그해 겨울 어머니는 그 소리를 또 듣고 싶어서,
일부러 빨랫감을 만들어 여러 번 냇가로 나가
일부러 치마를 물에 담그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조금 담그어 작은 얼음 조각을 만들고,
어떤 때는 많이 담그어 굵은 얼음 조각을 만들어,
얼음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온 날짜가 참 많았습니다.
그해 봄 동천 건너편 청일봉 기슭 참꽃들이
유난히 일찍 피어 붉고 뜨겁게 타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 월간 [유심](2014년 6월호)

#. 김선굉 시인(1952년생) : 경북 영양 출신으로 1982년 [심상]을 통해 등단. 구미 인동고 교장을 끝으로 퇴직한 뒤 열심히 시를 쓰고 있으며, 2022년 대구에 갤러리 [청라]를 오픈했고, 인문학·미학 플랫폼 [계산드림]도 창립했으니 노익장이라 해야겠지요.


페카 할로넨(핀란드)의 '얼음을 깨고 빨래하는 여인'



<함께 나누기>

보름 전 큰누님이 하늘로 갔습니다. 10남매가 한 배에서 태어났지만 이제 겨우 셋 남았습니다. 큰누부야는 제게 늘 아픔을 주는 분이셨습니다. 한 번씩 만날 때마다 누부야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제가 한겨울 황소바람 휘몰아치는 날(양력 1월) 태어났고, 기저귀를 빠는 담당은 당연히 딸 셋 중 큰딸인 큰누부야. 몫이었습니다. 당시엔 세탁기는 물론 수돗물도 없어 개울로 씻으려 갔나 봅니다. 매서운 추위에 개울물이 얼어 겨우 얼음 깨고 기저귀 빠는 것까진 가능했는데...
그날따라 얼마나 추웠던지 그 추위 견디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만약 지나가던 사람이 없었더라면 동사했을 터.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만 흔히 추운 곳에 누우면 입이 돌아간다고 하죠. 큰누부야는 하늘로 가는 날까지 입이 살짝 돌아간 상태로 살았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화자의 젊은 어머니는 한겨울에 마을 앞 시냇가에 가 빨래를 해야 했습니다. 얼음장을 깨고서야 빨래할 정도로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어느 날 빨래하러 갔다가 워낙 추워 시린 손을 달래며 서둘러 빨래를 하고 일어서려는데, 무슨 일인지 제대로 일어서지지 않았습니다.

“빨래를 하는 사이 물에 잠긴 치마가 얼어붙은 것이었습니다”

우스개 하나 던집니다. 중학교 때 사회 선생님이 시베리아가 얼마나 추운지 설명하시면서 예 하나를 들었습니다. 거기 사는 남자는 작은 나무망치를 들고 다닌다고. 그 용도가 겨울에 오줌 누면 바로 얼어버리기에 깰 도구로 쓴다나요.
오늘 시에서도 빨래하는 사이에 치마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가 봅니다. 저는 화자 어머니가 얼마나 당황했을까를 먼저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갖고 간 빨래방망이로 얼음을 툭툭 깨고난 뒤에야 치마를 떼낼 수 있었나 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에 붙은 얼음조각이 /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겨울 하늘처럼 맑고 고와서”

치맛자락에 붙은 얼음조각이 내는 소리가 하도 고와서 그 소리 듣고자 천천히 걸었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추위야 금방 사라지겠지요. 아니 어쩌면 추위를 이겨내려 한 어머니의 슬기로운 자세였을지도.
또 어쩌면 '강추위에 치맛자락 얼어붙은 일'은 시집살이가 그만큼 고되다는 암시도 되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시집살이가 징글징글 힘들었다고 신세타령하는 대신 그걸 재치있게 넘기려는 마음이 참 이쁩니다.

“그해 겨울 어머니는 그 소리를 또 듣고 싶어서 / 일부러 빨랫감을 만들어 여러 번 냇가로 나가 / 일부러 치마를 물에 담그기도 했습니다”

이 일은 화자가 태어나기 전 시집온 어머니가 젊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다 커서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라는 거지요. 치맛자락에 붙은 얼음이 내는 소리 듣고 싶어 일부러 치마를 물에 담갔다는 말에서 아들보다 어머니가 더 시인답습니다. 이런 정서가 자식을 시인으로 만드는 동력이었을지도.

“그해 봄 동천 건너편 청일봉 기슭 참꽃들이 / 유난히 일찍 피어 붉고 뜨겁게 타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봄꽃은 더 밝고 이쁘게 핀다고 하지요. 참꽃이 유독 붉고 뜨겁게 타오름은 어머니의 마음이 거기 담겼다고 봐야겠습니다. 또 한편 아들에게 일의 고됨을 고됨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즐기면서 하면 쉬 넘길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려 했을지도...


[충북inNEWS](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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