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
*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 *
<하나>
나이 때문인지 혼자 흥얼거릴 땐 최백호의 노래가 잘 어울린다. 「낭만에 대하여」도 그렇고, 「영일만 친구야」도 그렇다. 지금은 “봄날이 오면은 뭐하노 그쟈”로 시작하는 노래 「그쟈」가 은근히 더 끌린다. 딱 이 계절에 맞는 노래이니까.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에 대한 답은? 틀밭 만들기, 호박 구덩이 파서 호박씨 심기, 유실수에 거름 주기, 씨감자 심기... 또 눈요깃감은 얼마나 많은가. 홍매는 터졌고, 청매도 터지고 있다. 개나리도 망울 머금고 있으니 곧 터질 터. 아래로 눈 던지면 봄까치꽃도 보이고.
이틀 동안 틀밭 만들기에 매달렸다. 틀밭은 글로 써 배달한 적 있는데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텃밭 주변을 틀(궤짝) 형태로 감싸는 걸 말한다. 나는 틀밭 전도사다. 한 번 만들기가 힘들지 만들어놓으면 그보다 더 좋은 텃밭 형태는 없다고 확신한다.
벌레 잘 안 달라붙고, 물과 거름 주기 편하고, 열매 거두기 수월하고, 풀이 잘 안 나 시커먼 비닐 안 덮어도 되니 마을분들 눈에도 보기 좋은지 한마디 거든다. 허나 그냥 밭 만들기보다 틀밭 만들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다만 재료가 있다면 도전해 볼 만하고. 다행히 재료를 이웃에서 얻어 한 이랑 완성했다.
하루 일했건만 종아리가 뻐근하다. 그동안 겨우내 걷기 운동은 했으나 삽질 괭이질 같은 막노동을 안 하다 해서인가. 역시 노동은 이골이 나야... 텃밭 일은 거둘 때야 당연히 결실 있으니까 기분 좋지만 태가 안 난다는 말을 한다. 하기야 농사가 모양 좋을 리 있으랴.
우리 속담에 가끔 성차별적이거나 같은 여성이라도 딸과 며느리를 차등하는 내용의 속담도 더러 보인다. “봄볕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 내보낸다” 밭일할 때 딸과 며느리에게 일 시키기는 똑같지만 하필 봄볕과 가을볕의 차이를 두는 까닭은?
밭일할 때 모자를 쓰고 얼굴 가려야 함은 필수다. 알다시피 자외선이 피부에 가장 해롭다. 그 자외선을 차단하는 요소가 멜라닌 색소인데. 겨울엔 두툼한 옷 입고 다녀 멜라닌 색소 생산이 아주 적다. 그러니 봄볕 쬐면 바로 탄다. 가을은 그 반대로 여름에 단련되어 덜 탄다.
우리 집엔 딸도 며느리도 있지만 텃밭 일 시킬 사람은 없다. 둘 다 제 아들딸 키우느라 바쁘니까. 그러니 속담처럼 차별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나와 아내가 봄날 일할 때의 복장은 '닌자'를 연상케 한다. 봄볕이 쳐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장벽을 쳐야 하니까.
<둘>
다시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로 돌아가자. 앞에서 틀밭 만든다 했는데 노래 부르다 보니 뒤에 이어지는 노랫말이 의미심장하다.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 /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꽃잎이 피면은 뭐하노 그쟈 /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겨우내 얼어붙었던 산야가 녹아 일하기 좋은 계절이 왔건만 노랫말을 지은 작사자는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를 연발한다. 노랫말대로 하면 사랑하는 이와 워낙 멀리 떨어져 만나기 힘들다는 뜻을 담았다. 아무리 좋은 봄날이 와도 봄꽃놀이 같이 갈 사람 없다면 뭘 하랴.
이 노래를 농부 입장에서 부른다면 아무리 봄이 오고 일하기 좋은 계절이 와도 신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쌔빠지게 농사지어 봐야 남는 게 없다고 하니. 벼를 심어 봐야 쌀값은 다른 물가 상승률에 턱도 없는 대신 대출이자는 쑥쑥 높아져가고.
나 같은 엉터리 농군은 또 다른 말을 꺼낸다. 나이 드니 일하기 겁난다고. 아는 이들은 슬슬 쉬어가면서 하라고 하지만. 텃밭일 해 본 사람은 다 알리라. 부지런히 해야 할 때와 대충 해야 할 때가 나뉘니까. 일할 때 하지 않으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가령 밭 갈기 해야 하는데 밭을 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심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잡초가 솟아오를 때는 보이는 족족 잘라야 한다. 거둘 때도 마찬가지다. 때를 놓치면 썩거나 병들어 못 먹게 되니까. 가뭄 들면 물을 계속 대야 하고. 이러니 ‘쉬엄쉬엄 하라’는 말이 안 통한다.
<셋>
이쯤에서 봄의 어원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여러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고개를 끄덕일 만한 건 두 가지. 하나는 ‘보다’란 동사에서 시작되어, ‘만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절’을 의미한다는 설.
또 하나는 [두시언해]에 실린 한시(漢詩)에서 ‘뛰어오를 약(躍)’을 ‘봄놀다’로 번역하고 있으니 요즘 표현으로 바꾸면 ‘뛰놀다’와 같다. 위 둘을 모아 엮으면 봄은 ‘날이 따뜻해져 만물이 되살아나 활기차게 뛰놀고 새로 자라나는 물상을 보는 계절’이 된다.
이제 바야흐로 봄이다. 숨 죽였던 사물이 기지개 켜는 봄이다. 사람의 마음을 풍부하게 만드는 봄이다. 다만 다음 주엔 반갑잖은 꽃샘추위 찾아온다는데 이미 핀 매화가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할까 걱정이다. 꽃이 얼어버리기에.
“봄날이 오면은 뭐 하노 그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