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편 : 진이정 시인의 '애수의 소야곡'
@. 오늘은 진이정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애수의 소야곡
진이정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남인수와 고복수의 팬이던 아버지는
내 사춘기의 송창식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나는 또 누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부턴 열린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이 순간까지도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즐기려고 애써 왔다
허나 당신을 이해할 것만 같은
밤이 자주 찾아오기에
나는 두렵다
나는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해한다, 라고 똑 떨어지게 말할 날이
백발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추억이던 왜정 때의 카페와 나의 카페는
그 철자만이 일치할 뿐,
그러나 그런 중첩마저, 요즘의 내겐 소중히 여겨진다
아버지의 카바레와 나의 재즈 바는
그 무대만이 함께 휘황할 뿐
그러나 나는 사교춤을 출 줄 알았던
당신의 바람기마저도 존중하게 되었다
어쩌다 알게 되었지만, <바>라는 건 딱딱한 막대기일 따름,
난 그 막대기 너머, 저어 피안으로 가기를 꿈꾸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의 꿈을 알지 못한다
우린 색소폰의 흐느적임과 장밋빛 무대만을 공유할 뿐,
나는 그의 꿈을 끝내 넘겨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어
꿈이 빠져버린 그의 애창곡이나 듣고 있을 뿐,
허나 난 온몸으로 아,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아
남인수와 송창식을 서둘러 화해시킬 길을 찾는다
아니 억지로, 억지로 화해시키려 한다
가부장의 달빛만 괴기한, 이 이승의 쓸쓸한 밤에
아버지를 이해하는 게 왜 이리 두려운 일인지
잃어버린 그의 꿈이 왜 이리 버거운 짐인지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1994년)
#. 진이정 시인(본명 ‘박수남’, 1959년 ~ 1993년) :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함민복, 진이정, 유하, 박인택, 차창룡)이었으며, 폐결핵으로 고생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 동인들과 친우들이 힘을 합하여 1994년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펴냄.
<함께 나누기>
나이 따라 좋아하는 가수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저는 나훈아와 남진의 노래를 즐겨 부르지만 그 두 가수보다 송창식과 양희은 노래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아들이 대학 1학년 때 함께 가족 여행 갔는데 차 안에서 몇 시간이나 서태지의 어떤 점이 위대한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극소수에게만 소문난 ‘박정현’의 노래를 나흘 동안 들어야 했지만 덕분에 십 년 뒤 그녀가 떴을 때 아들의 선견지명에 기뻐했고...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으로 시작하는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은 부를 수 있지만, 서태지의 노래는 [난 알아요]만 조금 따라 부르고, BTS나 블랙핑크의 노래는 하나도 모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남인수와 고복수의 팬이던 아버지는 내가 사춘기 시절 즐겨 듣던 송창식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열린 마음으로 산다 자부하던 나는 사실은 어린 세대의 노래인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이해 못하는 사람이면 누구를 인정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그들이 부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즐기려 애썼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의 노래)을 이해하자 여태 이해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습니다.
“허나 당신을 이해할 것만 같은 / 밤이 자주 찾아오기에 / 나는 두렵다”
이상하지요.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던 참인데 그분을 이해하면 안 된다는 투의 진술이므로. 왜 그럴까요? 아버지를 이해함은 화자도 나이 들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런 식의 이해가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함을 뜻하지 않아서?
"그의 추억이던 왜정 때의 카페와 나의 카페는 / 그 철자만이 일치할 뿐"
내가 사는 지금과 아버지 시절의 '카페'는 발음만 같을 뿐 속뜻은 전혀 다릅니다. 현재는 식사나 모임 뒤 찾는 곳으로 커피나 후식 먹는 곳이지만 아버지 시절엔 아니었습니다. 카페는 여자 있는 술집이요, 카페걸 - 카페여급-은 술을 파는 일종의 술집 접대부로 월급 없이 웃음을 팔며 애교를 팔고, 심지어 몸까지 파는 여인을 가리켰으니까요.
"아버지의 카바레와 나의 재즈 바"
카바레와 바(빠)도 마찬가집니다. 아버지의 카바레와 젊은 화자인 내가 다니던 재즈 바는 원래 개념은 같았으나 용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카바레나 바가 남녀들이 춤추는 곳임은 같으나 아버지 시절 카바레는 남녀 불륜의 장소로 더 많이 애용(?)되었으니까요.
“남인수와 송창식을 서둘러 화해시킬 길을 찾는다 / 아니 억지로, 억지로 화해시키려 한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 이해의 첫걸음이 아버지의 남인수와 나의 송창식을 같은 위치에 두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진정으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억지로’를 반복했는지
“아버지를 이해하는 게 왜 이리 두려운 일인지”
어떤 회사 간부가 MZ세대와 가까워지려 요즘 유행어와 노래와 개그를 익혀 애쓴 결과 MZ들이 볼 때마다 “부장님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 변기에 앉았는데 밖에서 소변보는 젊은 사원 둘이 하는 말, “김 부장 있잖아. 참 불쌍해 보이대. 자기 나이 맞게 놀면 되는데 억지로 우리 맞춰준다고. 어쩔 수 없이 웃어주긴 했지만.”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두려움만 남습니다. 세대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는 게 오히려 더 나을지도.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아버지 세대의 노래나 풍습을 익힘만이 아니라 참된 아버지의 모습을 찾는 일이건만 그게 쉽지 않아 두려운지도.
아직 나는 아버지의 꿈인 뭔지도 모르는데 아버지를 이해했다고 잠시나마 단정했던 나 자신이 우습습니다.
*. 첫째 컷은 [삼성뉴스룸](2017년 6월 12일)에서, 둘째 스틸 컷은 영화 [사도]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