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편 : 이기철 시인의 '그렇게 하겠습니다'
@. 오늘은 이기철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가장 따뜻한 책](2005년)
#. 이기철 시인(1943년생) :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영남대 교수로 계시다 퇴직했는데, 작년 81세의 연세에도 [시골버스는 착하다]는 동시집을 펴내는 등 창작 활동을 계속함.
<함께 나누기>
요즘 가장 부러운 사람은 자신의 일을 끝내고 은퇴하면서, "나는 후회하지 않은 나날 보냈다." 또는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희망찬 나날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교직생활 35년 후회하지 않는 날보다 후회스런 날이 더 많았고, 보람찬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는데. 특히 아이들에서 함부로 내뱉은 말, 조금 생각한 뒤에 해도 되었을 행동, 그래서 아래 시구에 밑줄 그었습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오늘 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형태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류의 시가 시인 자신이 이러이러한 잘못 범했음을 고백함이 아니라 이 시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뒤 하나하나 용서를 구하라는 뜻 담았음을 잘 압니다.
"내 밟고 온 길 /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한 고승이 길을 걸을 때 고개를 숙인 채 아주 느린 속도로 걸어가다 잠시 멈추고는 합장을 하자 어린 상좌승이 묻습니다. 왜 그리 하시냐고. 그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무심코 걷는 걸음에 얼마나 많은 개미가 밟혀 죽어가는지 그래서 짬 내 그들을 위해 묵상한다"라고.
"내일을 맞기 위해선 /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소고기, 닭고기, 배추, 상추를 사먹어야 합니다. 허나 소, 닭, 배추, 상추를 키우는 이들의 공을 모른 체 지나칩니다. 아침에 길 나서다 도로가 깨끗함을 보고, 119 구급대의 요란한 경적음을 들으면서도 그 일을 하는 분들의 노고를 잊고 지냅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받을 줄만 알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마움을 모르고 그 향기로움만 탐하며 살았습니다. 저 많은 햇빛을 공짜로 쐬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감사해야 할 일이 참 많고 또한 사죄해야 할 일도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할 일은, 사죄하면서 시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게 지나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