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편 : 황규관 시인의 '마침표 하나'
@. 오늘은 황규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마침표 하나
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非文)도 미문(美文)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 [패배는 나의 힘](2007년)
#. 황규관 시인(1968년생) : 전북 전주 출신으로 포철공고가 최종 학력이며, 1993년 [전태일 문학상] 받으며 등단. 1987년 3월 구로공단의 안테나 공장에서 일을 시작해 그 후 제철소 등 노동자로 일하면서 시를 씀.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는 시를 많이 썼으며, 현재 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대표
<함께 나누기>
마침표는 한 문장이 끝났을 때 찍는 부호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예전에는 문장 끝에 반드시 마침표를 찍어야 했지요.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 하나. 대입 본고사를 치러야 했던 70년대 초반, S대학교 주관식 국어 시험문제.
‘~~ 본문에서 골라 하나의 문장으로 답하시오.’란 문제의 답란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제출한 답안이 많았던가 봅니다. 그때 마침표를 찍지 않은 답은 모두 오답 처리한 바람에, 그 뒤 모든 고교 국어 시험문제에 마침표를 찍지 않은 답은 오답 처리했다는 사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시로 들어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의 궁극적 목적을 어떤 철학자보다 명쾌하게 해명하는 두 시행. 한 문장 끝났을 때 반드시 찍어야 하는 점 하나, 그게 바로 마침표입니다. '두루뭉술', '대충', '적당히', '되는 대로'로 매듭지을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라면 그 매듭의 끝에 마감 짓는 부호가 바로 마침표입니다.
이 시를 쓴 뒤에 시인은 이런 뒷글을 올렸다지요.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나의 심정을 대변하며 쓴 시’라고. 여기서 마침표를 인생의 마지막에 찍는 죽음으로 한정시키려 했던 저의 어리석음을 되돌려봅니다.
한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말은 그 문장은 끝났지만 이어질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는 말이기도 하건만. 그래서 마침표는 현재로선 절망일 수 있지만, 새로 시작할 수 있음에 희망이 되기도 하는 시어임을 모르고 단지 마지막에만 눈을 줬으니.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돌아갈 곳마저 배신한 삶, 이 구절에 먹먹해지지 않는 사람 없겠지요. 얼마나 굴곡진 삶인지 짐작조차 못할 만큼 격렬한 시어. 하루하루가 전쟁터였을 것 같은 시인의 삶을 잠시 대입해 봅니다. 철의 노동자로 살아온 세월. 절망도 원망도 많이 했겠지요.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 또 울었을까”
아주 가는 불빛조차 보이지 않은 절망 속에 허덕일 때 그냥 주저앉으면 그만인데, 그냥 울어버리면 그만인데 끝까지 일어서려고 끝까지 나아가려 할 필요가 있었을까. 허나 화자는 어둡고 기나긴 동굴 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주저앉음이 선택의 마지막인 듯해도 한 번 더 눈 뜨면 길이 보입니다.
“소멸이 아니라 /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이 시구에 한참 눈길이 머뭅니다. 그리고 계속 입안에서 알사탕 녹이듯 단맛을 느껴보았습니다. 한용운 님의 「알 수 없어요」에서 한 시행이 떠오르더군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소멸 끝에 다시 재생의 싹 틔움을. 절망의 끝에 이르면 희망이 보인다던가요.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 마침표 하나, /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그래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비루한 삶이라도, 아무리 절망적인 삶이라도 아직 마침표 찍을 자리가 남아 있다면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울 수 터. 아무리 화려한 삶이라도, 또 지독히 비루한 삶이라도 소멸은 공평합니다. 그게 어쩌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마지막 동아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