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편 : 박후기 시인의 '꽃기침'
@. 오늘은 박후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꽃기침
박후기
꽃이 필 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한 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고 지는 꽃들이
하얗게 몸살을 앓는 봄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2009년)
#. 박후기 시인(본명 ‘박홍희’, 1968년생) :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2003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소외받는 소시민을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 사태 등에 현장의 고통을 전하고 노동자의 삶과 기지촌 여성의 아픔을 알리는데 애쓴다는 평을 들음.
<함께 나누기>
목련에 대해 사람마다 느끼는 공통 감정은 참 이쁜 꽃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목련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없으니까요. 헌데 목련이 자기 마당에 소재하는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꽃이 피면 이쁘긴 한데 너무 빨리 지고, 지고 나면 떨어진 꽃잎이 지저분하게 만드니까요.
오늘 시는 행과 연에 쓰인 표현보다 제목에 먼저 확 끌렸습니다. 어떤 경우엔 제목이 그 시를 다 보여주는 경우를 더러 보았으니까요.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오늘 배달하는 시 제목 ‘꽃기침’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시인이 만들어낸(창조한) 말이란 뜻이지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시어입니다. 꽃에서 나온 꽃가루가 기침을 내뱉게 만든다는 뜻으로, 꽃이 피는 그 순간 나무는 몸살을 앓아 저도 모르게 기침하는데 그때 꽃이 핀다는 뜻으로도.
시로 들어갑니다.
“꽃이 필 때 /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꽃이 필 때 꽃이 몸살을 앓는다는 표현은 드문드문 봅니다만 몸살을 앓으니까 기침이 나오고, ‘기침할 때마다 /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 팍팍, 터진다’는 표현은 본 적 없으니 창의성이 돋보이는 연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새로운 게 태어나기 위해선 그냥 아무렇게나 생겨나지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달걀이 병아리가 되기 위해선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이 필요하다"라고. 그처럼 목련꽃 피려면 목련이 몸살을 앓아야 한다는 뜻으로 새겨도 됩니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 나는 기억한다”
여기서 당신을 목련으로 봐도 되고 사랑하는 님으로 봐도 됩니다. 둘 다 처음 만났을 때 나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던 그 ‘소름 돋음’은 똑같았기에. 목련은 아마 봄꽃 가운데 가장 크고 뚜렷하여 눈에 박힌 영상이 잘 잊히지 않고, 그대 또한 어떤 사람보다 내게 큰 그리움을 남겼습니다.
첫 만남에서 이끌린 첫사랑의 추억 간직하고 있는 이가 읽는다면 이 부분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오겠지요.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찾아온 듯한 그 황홀함, 온몸에 돋아나던 그 소름, 찰나가 아니라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순간들...
“떨림이 없었다면 /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 떨림이 없었다면 / 사랑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구를 대하는 순간 바로 책갈피에 넣어두었습니다. 이런 시구는 한 번에 먹지 말고 넣어뒀다가 꺼내 잘 녹지 않는 알사탕 녹이듯이 서서히 맛보아야 합니다. 기침으로 인한 떨림, 그 때문에 목련은 꽃을 피웠습니다. 그대를 보고 설렌 첫 느낌, 그로 하여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하도 아름다운 꽃이라 한 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허나 시간이 가면서 꽃잎 지듯 사랑도 시들어 갑니다. 어느 날 피어난 목련처럼 느닷없이 사랑이 시작되었고, 떨어지는 꽃잎처럼 신열을 앓다가 사랑은 내 곁을 떠나갑니다.
“피고 지는 꽃들이 / 하얗게 몸살을 앓는 봄밤, /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목련은 워낙 화사하게 꽃 피웠다가 순식간에 허무하게 떨어집니다. 피는 모습과 지는 모습이 극적인 장면처럼 연출하는 꽃이 바로 목련입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꽃과 나무가 느끼는 꽃은 다릅니다. 우리는 꽃이 피어남에 방점을 찍지만, 나무는 꽃이 짐에 더 마음을 씁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니까요. 꽃이 져야 자손이 번창하니까요. 꽃이 짐은 아프지만 또 다른 결실을 남기니까요. 그대와의 사랑도 진행되는 그 순간에는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모르다가 떠나고 나면 그 가치를 알게 되듯이...
*. 첫째 그림은 박항률 화백의 제목 「새벽」이란 작품 중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