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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22)

제322편 : 최승자 시인의 '너에게'

@. 오늘은 최승자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너에게
최승자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 [내 무덤, 푸르고](1993년)

*. 참고로 같은 제목 시인의 시가 [이 시대의 사랑](1981년)에도 나옴

#. 최승자 시인(1952년생) : 충남 연기 출신으로 '79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함께 나누기>

시인 소개를 덧붙이면서 시 해설을 시작합니다.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로 뉴스에 올라 시인의 가난을 얘기할 때 꼭 거론되는 시인 ‘최승자’,
여류시인이란 용어에서 ‘여류’란 접두사를 떼게 만들도록 굵직하고 거칠게 시를 쓰는 시인 ‘최승자’,
조현병 같은 정신 질환을 앓고,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고도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계속 시를 쓰겠다는 시인 ‘최승자’,
국문학과나 문창과에 들어온 여학생들에게 교수들이 가장 먼저 읽으라고 권한다는 시인 ‘최승자’,
시집 한 권 다 뒤져도 달달한 시 한 편 없어 정말 시 좋아하는 사람들만 찾는다는 시인 ‘최승자’,
시집 한 번 읽고는 그녀를 좋아하진 않아도 그 이름만은 기억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시인 ‘최승자’

오늘 시도 쩌릿쩌릿함이 절로 우러나오는 최승자 류의 시입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라는 표현에서 너는 내게 존귀한 사람까진 아니라도 가까운 상대임은 분명합니다. 헌데 나는 너에게 치명적이라 합니다. '치명적'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생명을 위협하는’ 또는 ‘일의 흥망,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뜻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게 하등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해치는 존재일 뿐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다음 시구에 나옵니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목숨밖에는”

내가 네게 가까이하고자 함은 내가 가진 것을 팔(주)고자 함에 있습니다. 헌데 다 팔고 남은 건 목숨밖에 없다 합니다. 지독한 가난 - ‘스스로 초래한 가난’이라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 때문에 가재도구를 팔고, 모은 책을 팔고, 급기야 피도 팔게 됩니다.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자기가 원하는 삶 아니면 거부했던 삶. 살기 위해 이것저것 다 팔고 목숨밖에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이 그리는 문학에의 열정 하나만은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네게, 또 세상에게, / 더 이상 팔 게 없다”

이제 너의 정체가 살짝 드러납니다. 뒤에 이어지는 세상과 연결시키면 한 사람이기보다 자기를 둘러싼 사회에 속한 사람이라 봄이 좋을 듯. 이제 화자 영혼의 집에 있는 텅텅 빈 쇼윈도. 거기에 걸려 있는 건 오직 박제된 목 하나만 덜렁덜렁 걸려 있을 뿐.
여기에 이르면 화자의 육신만 무너진 게 아니라 영혼도 무너진 듯합니다. 어쩌면 조현병을 앓으며 정신병원을 무시로 드나들던 시기가 아닌지... 그때 거울을 들여다봤으면 자신의 얼굴 대신 영혼이 보였을지도. 그 영혼은 생기도 움직임도 없는 박제나 마찬가지였을 터.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나는 치명적이다’로 시작해선 마지막에 이르면 ‘나는 치명적이라 한다’로 끝맺습니다. 둘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앞이 스스로 나를 평가한 표현이면 뒤는 제삼자가 내리는 평가입니다. 즉 이제 나는 모두 사람이 다 인정하는 ‘치명적 인간’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문득 스스로를 치명적이란 대문 안에 가둬놓고 남과 접촉을 차단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이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은 조금 덜 어려운 우리같은 사람에게 도움의 목소리를 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막다른 궁지에 몰렸으니 제발 한 번만 이쪽으로 눈 돌려 달라고.
그래서 처음과 끝부분에 "네가 왔으면 좋겠다”란 시구 넣었을지도.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표현이니까. 오늘도 어디서 ‘마지막 팔 것이라곤 목숨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아픈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올지 모릅니다.


밝고 행복한 삶을 노래하는 시도 필요하나 때론 처절하리만치 어둠과 불행을 비추는 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아픔을, 외로움을, 절망을 치유하는 데는 달달한 위로의 말보다 그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 더 도움 될 때가 더러 있기에.
바로 이 점이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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