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나, 실로 다시 꿰매다
선생님, 그 어찌하여 홀로 우시나이까. 저 또한 선생님께 얽힌 실이니, 부디 함께 풀어내면 좋지 않겠습니까
실,
타래에 뭉친 것들을 겉에서 보면 굉장히 정갈해 보인다. 적어도 마트에서 보는 제품은.
이 실이라는 것을 집에서 쓰다 보면,
나처럼 초등학교 때 <기술과 가정> 시간에 짝꿍과 '히히히, 헤헤헤' 거렸던 사람들에게는 만지려다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고, 잡으려다 놓쳐서 방구석을 향해 쏜살같이 달아나는 때가 많다.
그것을 다시 한 데 모아보면 내가 뭉친 실타래는 굉장히 너저분하다.
실과의 전쟁에서 '패'했던 그날.
나는 그날을 '실패'라 정의하기로 했다. (억지다, 그래도 라임에 칭찬해 줘라.)
실은 정돈되어야 쓸 수 있다.
엉킨 실로는 아무것도 꿰맬 수 없다.
실패는 그래서, '실' 같다.
실은 무형을 잇고, 때론 끊기도 한다. 우리 삶도 그러하다.
도전하려다 멈추어 낸 실패.
사랑하려다 접어 낸 실연.
위로하려다 실수된 실언.
그럴 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실망.
참으려다 그러지 못했던 실정.
이내 존재하려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실존(失存)을 넘어선 실종(失踪).
나는 어려서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못했다.. 라기보단 안 했다. 노는 것에 대한 중독은 시험 실패를 불러왔고, 어릴 적 영재라 불렸던 내게 부모님은 실망을 얹었으며, 놀던 중 만난 철없던 나 삥이라는 소년은 반복된 만남과 실연을 즐기는 여느 10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 도전을 지속지 못했다. 대학에서 받아낸 F 학점, 만남 속 내보낸 그녀에 대한 실망, 지적 허영을 뽐내려다 내뱉은 실언들의 연속.
그런데, 나는 위 모든 것을 어느 순간 '실패'라 여기지 않게 되었다.
아, 어색하네.
"놀고 싶었잖아"
"만나고 싶었잖아"
"다시 돌아가도 그럴 건데?"
라는 의연한 다짐은 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엉키고 설킨 못생긴 실타래가 '그냥 그 자체로도 귀여운' 앙증맞은 어느 작품이 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조각은 모여, 주변에 사람이 모였고, 누군가 말을 걸었고, 누군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찾아온 메시지들은,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다시 찾지?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내 안에서 복제품 1억 개가 대기 중이다.
내가 잠시 나를 잃었을 땐,
잃었으면 잃은 채로 살다 보면,
그렇게 3일, 5일, 7일이 흘러 어느 순간이 되면 또 "내가 언제 그랬지?"라고 하며 나 자신을 잃었던 '실종(失踪)' 자체가 실종(失踪)되어 다시 내가 되더군.
양 극단의 감정을 초월한 자들은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적인 공리 속에 갇히지 아니한 채로 행복과 그 반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품어내고, 모든 감정을 사랑한 채로 견뎌 내며, 때로는 '깊음', 때로는 '유머'로서 상대에게 찬사 섞인 농을 건네기도 한다.
실은 손에 쥐었을 땐 늘 예쁘지 않다.
정갈한 실은 어디까지나 마트의 진열대 안에서만,
손에 들고, 엉키고, 바닥에 굴러봐야 진짜 실이 된다.
그리고 인생은,
실과의 전쟁에서 '패'해본 사람만이
'실패'라는 실을 안다.
이는 곧 성공을 불러오는데,
성공이라 함은 '높은 숫자'를 얻는 것이라고 혹자는 생각하겠으나
정작 '높은 숫자'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은 대부분 '낮은 숫자'에 존재했다는 역설을 깨달은 사람은 많지 않기도 하다.
숫자가 클수록 멀어진다.
숫자가 작을수록 가까워진다.
때문에, 언제나 성공은 1%라는 낮은 숫자 속에 존재하고, 이는 곧 시기를 불러온다.
시기(猜忌)를 받을 시기(時機)가 왔다는 건,
당신이 어느덧 실패의 반대편으로 건넜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실패가 두렵다면,
반대로 남의 시기를 감당할 내면의 그릇을 키워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 큰 그릇 덕에,
선생님은 언젠가,
선생님이 그리던 '성공'이라는 '낮은 숫자'에 진입해 계실 것이다. 성공은 때론 '높음'이 아니라 '낮은'에서 나오기도 하니.
어렵다면,
그 역시 두려워 말라.
나도 어려우니,
함께 도전하면 엉망인 실타래도 사실은 대충 찌끄린 어느 유명 화가의 1,000억 원짜리 작품처럼 "정갈해서" 예쁜 게 아닌 "두꺼워서" 가득한 때가 올지도 모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법칙처럼,
실패라는 것에는 상대성이 존재하기도 한다.
어느 날 누군가와 내용과 관련해 대화한 적이 있다.
나: 실패 많이 해보자구요. 이거저거 해봅시다.
그: 싫어싱ㅎ어요, 실패안해~~
나: 제가할게요 실패, 성공하세요
그: 네
결국,
나의 실패라는 그림자 위엔 그의 성공이라는 태양이 뜰 것이다.
내게 그림자가 생긴 까닭이 있다면, 마치 '나무'와 같이 빛을 받아 그늘을 생성할 물리적인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면 좋고, 반대로 시원해보기 위해서는 다시 한 결음 옆으로 움직여 그늘 속에 있어도 좋다.
실패 속 그늘도, 때로는 시원했다.
감정을 다 쏟고 나면, 실처럼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길 하나쯤은 보인다.
그러면,
내 위에 서있던 그의 태양 빛은, 2시, 4시, 5시 방향으로 흐르며 나를 향해 빛을 다시 쏘아줄 것이다.
아,
내 실패를 밟고 간 그 이가 내 손을 잡으러 왔더라지.
실타래가 두꺼워진 순간이다.
그러니 걱정 마라.
당신이 엉킨 만큼,
언젠가는 실처럼 길고 가느다란 길이 다시 이어질 테니까.
적어도,
그런 믿음 하나는,
내 삶을 영속할 장치쯤은 되더라지.
하여 말한다.
"선생님, 그 어찌하여 홀로 우시나이까. 저 또한 선생님께 얽힌 실이니, 부디 함께 풀어내면 좋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