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쓰는 마지막 입찰 제안서
<Ólafur Arnalds - Near Light (Official Music Video)>
늙는다는 것.
그것은 사라져 간다는 예고일까,
혹은 덜어내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일까.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은, 반드시 '의미'라는 온도로 맞이하고 싶다.
늙는 건 무섭지 않다.
다만, 누구와 함께 늙느냐가 문제다.
어떤 모 유명 애니 작가는 '늙음이란 꿈을 잃었을 때, 눈가에 생기가 차지 아니하고, 숫자의 $표시가 떠오를 때'라고 하여 꿈을 품은 자는 젊고 아름답고, 꿈을 잃은 자는 늙고 추한 캐릭터로 묘사한다고 한다.
의학 저서에 의하면 '노화'란 본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물의 신체 기능이 퇴화하는 현상이다. 세포의 노화는 세포가 분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화는 일반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이 감소하고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며 질병에 걸리는 위험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저서에 의하면 '늙음'이란 본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변화가 동반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다. ... (중략) ... 늙음은 단순한 물리적 변화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 맥락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위 '정의'들이 모두 100% 맞는 말이며, 더 이상의 부연 설명 자체가 사치일 정도로 우리네 삶에서는 전제조차 필요 없는 공리(公理, axiom)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이제 이 물음으로부터 각자 해석의 갈래에 따라, 누군가는 '영원'을 말하며, 또 다른 어떤 이는 '0원'을 말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지금'을 말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조금 더 있다가'를 말할 것이다.
영원의 삶을 믿고 싶은 자,
0원이 되어 경제력을 잃는다면 생명 또한 잃는다고 믿고 싶은 자,
지금 본인이 늙은 것 같다며 한탄하는 자,
지금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늙을 것 같다며 걱정을 품은 자,
모두가 한 가지에 대한 경계 가득한 '두려움'으로 말을 할 텐데 아마 그것은 생명이라면 가장 품기 싫은 개념인 '죽음'. 즉, 영결종천(永訣終天)을 맞이할 때일 테지.
우리 인간은 노화란 현상을 겪는다.
속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으나 이는 필연(必然)이다.
학급이 오르고,
졸업을 하여,
군대를 가고,
또다시 졸업을 하여,
취업을 하고,
진급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삶을 살다가,
아이를 보내고,
손자를 맞이하고,
주름이 생기고,
이전 직(職)을 내어놓고,
새로운 업(業)을 맞이하고,
조금은 더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운명(殞命)한다.
이 과정 속 '잃음' 혹은 '손해 봄' 등의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살면서 저 과정 하나하나의 디테일 속에서는 '탄력을 잃고', '재산을 잃고', '사랑을 잃고' 등의 이벤트들이 존재할 수는 있겠으나 '얻다'와 '잃다'의 이분법 속에 갇히지 아니한 채로 삶을 바라볼 경우 모든 인간은 저 흐름 속에 놓여있다.
태어나고,
물러난다.
우리 인간은 늙음이란 현상을 겪는다.
속도의 차이는 존재하고 이는 우연(偶然)이다.
이름을 잊고,
욕망을 잃고,
속도를 잃었을 때.
허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다."라고 하듯이
우연은 가끔은 '의지'의 발현으로 필연이 되는 때가 있다.
이름을 잊기 싫어 가득하게 부를 때,
욕망을 잃는 것이 아닌 욕망이 무해해졌을 때,
그리하여 세상의 욕망과 속도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을 깨달았을 때.
그제야
정작 '높은 숫자'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은 대부분 '낮은 숫자'에 존재했다는 역설처럼, 때문에 언제나 성공은 1%라는 낮은 숫자 속에 존재한다는 그 진리처럼,
나를 지워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덜어내며 더 나다운 형체로 수렴되어 가는 과정이 바로 '늙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은, 반드시 '의미'라는 온도로 맞이하고 싶을 때가 있다.
늙는 것은 무섭지 않다.
다만, 누가 함께 늙느냐가 매우 큰 문제이다.
그리하여,
내가 운명(殞命)하는 것은 '우연'을 가장한 '선택적 필연'이 될 것이다.
내가 사랑을 다 쏟아낸 뒤,
마지막 잔 하나가 남았을 때.
그 잔을 당신네들께 건네어,
"고마워. 이제,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맞이할 적절한 죽음일 것이고,
이는 0원이 되어 떠나는 내 육체가,
내 정신을 '영원'으로 살게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마지막 물음에,
의학은 대답하지만, 철학은 다시 묻는다.
때문에 당신은 이 물음에 대해 당신의 지갑이 0원이 될 때까지, 혹은 영원히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늙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영원을 사는 어리고 어여쁘며, 온전하고 순전한 상태의 아이. 괜찮다면, 그런 상태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고찰할 시간에,
주변을 더욱 사랑할 것을 제안해 본다.
누군가의 홍보 기획 총괄자가 아닌,
당신네의 인생 기획 동반자로서 입찰 제안서를 이렇게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