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거울이고, 사랑은 반사된 빛이다
Ver | 2025.04.23 당시의 글, 리라이팅
누군가의 눈가에 뜨거운 웃음을 데우는 존재.
아침을 여는 햇살 같고,
말 한마디에 하루가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그런 힘.
하지만,
지나간 장면을,
사라진 마음을 매만지며
사실을 너무 잘 알아채는
그런 감각으로
누군가는 내게 건넨다.
"삥이는 참 밝다."
또 다른 이는 내게 읊는다.
"삥이는 외로워 보여."
그래,
나는 모든 말을 안다.
기쁨이 웃음의 모양만 닮은 게 아니듯,
슬픔도 꼭 눈물로만 흐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사이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기쁨과 슬픔이 마주 잡은 손 사이에서
이름 없는 감정으로 피어나는 그 무엇.
'삥이'라는 이름 아래
나는 그 모든 결을 살아냈다.
누구의 위로가 되기도 하고,
누구의 고백에 떨리기도 하고,
누구의 기억 속에서 오래 잊히지 않는 순간이 되기도 하면서.
그 물음은 결국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인가?
존재라면,
어떠한가?
나의 모습은
볼만한가?
나는 기쁨이며,
슬픔까지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갖춘 한낱 인간 따위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는 이제야 알겠다.
나는 '너'다.
네가 웃을 때 기쁨이 되고,
네가 울 때 슬픔이 되는 존재.
나는 스스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너로 인해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존재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볼에 수없는 물을 수놓는다.
고마워,
수천 마디,
수십억 마디를
수십 시간 동안
속삭여도
고마움의 표현이
부족할 너에게.
"나는 기쁨인가, 나는 슬픔인가."
필자는 여기서 묻지 않는다. 당신의 대답을 유도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나 자신을 감정이라는 언어의 경계선 위에 놓아보았다.
감정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반사되는 유동적 현상일 수도 있다.
나는 나이되,
너의 시선 속에 반사되어 나를 안다.
'기쁨일 때의 나'도,
'슬픔일 때의 나'도 사실은 당신이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정의하려 한다.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밝은 사람인지, 어두운 사람인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인생에서 큰 진리이며, '행복'과 '밝은'이라는 정의에 도달하면 마치 남들을 향해 증명이라도 해야 하듯이 SNS를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기쁨이 웃음의 모양만 닮은 게 아니듯,
슬픔도 꼭 눈물로만 흐르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은 서로를 관통하며 존재한다.
사랑과 외로움이 결코 분리되지 않듯이 감정이란 '공존하는 순간들'이며, 삶이란 그 모든 감정을 함께 살아낸 서사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95년).
그가 말했지,
"타자 앞에서의 무한한 책임." 그리고 "너로 인해 내가 나임을 깨닫는 존재론적 진실".
철학이란 본디,
그리하여 학문이란 본디,
엉덩이를 의자에 오래간 붙이고 앉았다고 완성되는 단어는 아니다.
사유의 형식이 아니라,
살아낸 감정의 기록으로서의 철학.
기쁨과 슬픔,
사랑과 고독,
말과 침묵 사이에서 나라는 이름의 존재가 '존재의 거울'로 피어나리다.
그리하여,
'기쁨일 때의 나'도,
'슬픔일 때의 나'도 사실은 당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