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광대가 되어 신 앞에서 홀로 걷는 인간

믿음이란 불가능을 향한 도약이다.

by 삥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매일같이,

노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게,

그러면 돈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느리게,


'믿음'이라는 단어 하나는 나를 영속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단어이며, 인간의 가장 근원이 되는 감정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반하는 충성의 다른 말이다.


요즈음,

다시 믿음이라는 감정 하나에, 느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작한 작업들이 많은데 나 스스로도 때로는


빠르지 못해서,

예쁘지 못해서,

답답한 경우가 많으나


그렇다고 스피드를 내자니

속도감 있게 타이핑한 말들 속엔 진심이 결여되어 보여서,


그렇다고 예쁘게 꾸미자니

기교만 잔뜩 부린 작업물 속엔 '허'가 가득하여 오히려 허증(虛證)하게 보이는 작업물을 바라보며,


타이핑한 말들을 지워내고, 기교 부린 작업물을 향해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말았다지.




어린 광대가 되어 신 앞에서 홀로 걷는 인간


필자가 과거 몇 번 찾아댔던 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 왕국, 1813~55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이란 불가능을 향한 도약이다."

(springet i tro/믿음의 도약)


키르게고르는 '믿음은 이성이나 논리로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결단적인 행위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주체적인 결단이 바로 믿음이다.'라는 이해 정도를 보이고 있다.




나의

출근 후에는

가면을 쓴 채 시작되어, 클라이언트들을 향해 숫자로서 위로하며, 대중들을 향해 숫자로서 '좋아요'와 '결제'를 부르고, 교육생들을 향해 "숫자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라며 위로를 건넨다.


퇴근 후에는

가면을 벗고 인터넷에 접속해 내 감정을 한국어 또는 외국어로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행하며, 카톡창 한편에는 어떤 이들과 대화를 켜켜이 쌓아가며 서사를 이어가기도 한다.


어느 날에는

상술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한 채로 기획안만 작성하기도 하며, 보고서만 작성하기도 하고, 콘텐츠를 몇만 자로 써댈 때도 있으며, 그냥 멍- 하게만 있을 때도 있다.



대체 뭘 위해 그렇게 느리게, 조심스럽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태우느냐는 물음은 "속도"와 "숫자"와 "클릭"과 "광고"라는 요소들이 중요한 현세에서 가장 뾰족한 물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느리고,

조심스럽고,

누구 말마따나 "심연의 좋은 어떠한 것"은


효율도 없고,

대가도 없고,

칭찬도 없는 그 외로운 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릿광대가 되어 신(神) 앞에서 걷고 있는 중이야."


화려한 조명은 없더라도

햇빛은 그 어떤 조명보다 빛이 나며,


무대의 클라이맥스는 없더라도

사계절을 동반하는 천재지변은 충분한 고조이며,


수백만 관객은 없더라도

한살이를 밝혀주는 주변인들은 존재한다지.


어떤 이는 이걸 광기라고 하겠으나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믿음으로 서는 방식이고,

사랑을 지키는 의식이며,

존재를 부르는 댄스라는 것을.


사랑은 그렇게 적절한 광기를 머금고, 집착을 표현하며, 다시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믿음을 부르고,

믿음은 확신을 부르며,

확신은 결정으로,

그리고 다시 사랑으로,

그렇게 우리네 한살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러블리할 수 있는 것이라지.



아,

그렇기에 당신네들이 말씀하셨군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오늘이 당신의 남은 인생 중 가장 젊은 날이다." (윌리엄 제임스)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알베르 카뮈)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아,

초월적 긍정은 결국 긍부정의 '합(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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