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능으로 사랑하고, 무지로 두려워한다.
<Labrinth - Jealous (Official Video)>
라는 말은 대중매체 속에서 혹은 우리네 삶 속 가벼운 대화 중에서 조금은 본능을 품어낸 외설(猥褻)적인 뜻으로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은 인간이 품은 '본능' 그리고 '욕구'를 가장 간단한 말로 풀어낸 것이다.
이제, 위 문장에 목적어를 곁들이면 문장의 이미지가 상당히 순화된다.
공부하고 싶다. (고요함)
일 하고 싶다. (의무감)
운동하고 싶다. (의지)
사랑하고 싶다. (폭발!)
'하고 싶다'는 말은 그렇게 말하는 이의 가장 뜨거운 욕망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낸다.
우리는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을 들고,
보고서를 쓰거나 받거나 제출하며 시간을 쌓는다.
점심을 먹고, 간식을 먹고, 퇴근 이후
누군가는 야근을, 누군가는 운동을, 누군가는 잠을 선택한다.
이 모든 행위에는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혼재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 안에서조차 하고 싶은 것부터 손대려 한다.
보고서를 쓸 때,
가장 자신 있는 파트부터 쓰고.
회식 자리에 나설 땐,
가장 편한 사람 옆자리를 먼저 선점하려 애쓴다.
어느 날,
내 교육생 중 누군가 내게 물었다.
"삥이님, 인간의 감정은 사실 두 가지만 있다고 해요. 사랑과 두려움. 사랑을 제외한 모든 감정 불안, 분노, 시기, 질투, 슬픔 결국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요. 그래서 두려움을 제거할수록 인생 자체가 성공을 떠나서 천국이 된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할 때마다 뒤따라오는 감정들은 항상 사랑에서 비롯되거나, 그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제 나는 본능을 말하고 싶다.
인간은 본능을 지닌 동물이다.
그리고 그 본능은 단순한 생존 욕구를 넘어, 감정과 감각, 사유로 이어진다.
그 본능의 가장 근원에는 두 감정이 존재한다.
'사랑'과 '두려움'.
이 둘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감정을 파생시킨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영국, 1809~82년)이 그러더군.
가장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가장 똑똑하다고 해서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것이 살아남는다.
(It is not the strongest that survives, nor the most intelligent that survives, but the most adaptable to change.)
나는 남들처럼 아무런 증거도 없이 속 편하게 우리가 설계된 존재이고 은총 입은 존재라고 믿을 수 없다. 내가 볼 때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있는 듯하다.
(But I own that I cannot see, as plainly as others do, & as I should wish to do, evidence of design & beneficence on all sides of us. There seems to me too much misery in the world.)
우리는 신(神)보다도 열등하지도, 흙(土)보다도 우월하지도 않다.
그저 감각을 통해 본능을 일깨우고, 본능을 통해 삶을 살아낸다.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데 이 모든 감정의 근원에는 '사랑(愛情, amore)'이라는 녀석이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찬란하다', '아름답다', '섹시하다' 등의 감정을 유발하는 어떤 무형 혹은 유형의 것에게 호기심이 향하게 되어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지(無知 ; 아는 것이 없다.)가 동반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외려 '사랑'으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는 '몰랐다가 알게 된 찬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순간이 된다.
대표적으로,
개싸가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깊었던 누군가.
또 대표적으로,
냄새부터 외면했던 두리안, 한 입 베어 물자 황홀한 단맛.
더 대표적으로,
죽음. 공포 그 자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윤회(輪廻)의 입구.
위 3가지 사례는 '내가 외면하고 싶었으나' 알고 보니 찬란하고, 아름답고, 그 자체로도 너무나 선명하기에 외려 사랑과 경외의 마음을 갖게 하는 무엇인가 들이다.
잘 보면 3가지의 녀석들에 대해 공통점을 엿볼 수 있는데
저 세 녀석들은 가만히 있었고,
저 세 녀석들을 보는 내 시선과 그 속 생각만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 사랑은 사랑 다섯 스푼, 집착 두 스푼, 광기 한 스푼을 담아 나머지 두 스푼은 '무지' 정도로 남겨두는 게 완성일 듯 싶다.
나머지 두 스푼은 '과정'이라는 녀석이 채워주어 나를 '두려움'에서 '확신'으로 바꿔줄 것이다.
즉,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품든 결국 내가 느낄 최종안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뭐,
두려우면 어때?
찢어져 볼게.
'실'이라는 단어 자체를 어려워하는 듯싶다.
도전하려다 멈추어 낸 실패.
사랑하려다 접어 낸 실연.
위로하려다 상처 준 실언.
그럴 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실망.
참으려다 그러지 못했던 실정.
이내 존재하려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실존(失存)을 넘어선 실종(失踪).
이 모든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조금 더 두려움을 유발하는 감정이 있다면, '상실'이다.
단어 자체의 뜻을 볼 때 실패는 '어떠한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상실(喪失)은 '갖고 있던 것을 놓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돈을 상실하고,
누군가는 관계를 상실하며,
또 누군가는 삶을 상실한다.
이 상실이라는 녀석이 주는 감정 낙폭의 차는 경우에 따라 상상이상의 파급력을 가지는 데 필자의 경우 아주 조그마한 상실에도 꽤나 깊은 타격을 받는 편이니 이 녀석만큼은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해 보는 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엔 다시 사랑하게 되더라.
결국,
실패를 품다 보면
'잃은 사랑'이 돌아올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랑'으로 날아올 수도 있고,
결국 윤회(輪廻)의 입구에 들어가 출구로 나오는 기이한 현상을 마주할 수 있다.
두려움은 결국 사랑을 감싸는 껍질 같은 것이니,
껍질을 벗기면 상처와 함께 열매도 같이 나온다.
그래서야.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는 말처럼,
철단익강(鐵鍛益強)이라는 말이 남았나 보다.
사랑의 열망이 클수록, 두려움도 따라오고
그 두려움이 클수록, 껴안을 용기도 커지니.
그건 좀 싫긴 해.
아프니까.
그래서,
사랑을 잃는 건,
정말.. 죽어도 하기 싫어.
그런데 말이야,
정말 죽도록 하기 싫은 걸 끝내 해내는 순간.
그게 '진짜 하고 싶은 일'이었단 걸 뒤늦게 알아버릴 때도 있어.
사랑을 잃는 게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던 어떤 날,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순간 그 두려움 속에서 진짜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듯이.
실패가 너무 부끄러워서 숨어 지냈던 날들,
다시 걸음을 떼는 순간 그 부끄러움 속에 있었던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게 되듯이.
하기도 싫은 것.
피하고 싶었던 것.
무너졌던 기억.
미워서 도망친 것.
그 모든 것을,
한 번쯤 껴안아보면
어느새 그게,
너무도 하고 싶었던 일이 되어 있더라지.
결국,
사람이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걸 지나야 만 한다지.
그러니 나는 오늘도,
마주하기 싫은 상황이 오더라도
눈물을 꾹 참으면서 두 팔 벌려 맞이해보려고 해.
그러면,
죽어도 하기 싫은 걸 조금씩 지워가면서
진짜 하고 싶은 걸 끝내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음..
뭐, 사실은 이렇게 쓰고도 모르겠어.
근데 또 모르니까 해보는 거겠지.
이번엔 안 아플 수도 있으니까.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을 마주하게 될 때,
난 도망쳐야 하는지, 아니면 의연한 모습으로 죽을 걸 알면서도 마주해야 될지 말이야.
아마,
'사랑'이라는 녀석을 지키는 사명을 가졌을 땐,
죽어도 하기 싫은 것들을 마주하게 될 때, 의연한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 듯해.
쓰고 보니,
하고 싶은 것의 힘은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는 초석이 되기도 하는구나.
아,
초월적 긍정은 결국 긍부정의 '합(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