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차은우였네.

진짜 싹싹 빌 테니까 악플 달지 말아 주세요.

by 삥이





나는 태어나는 법을 잊었다.



누군가는 말했지.

너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살아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살아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keshi - UNDERSTAND>




序論



감정이 진심이 되는 순간,

세상은 경외를 품고,

동시에 '공포'를 겪기 마련이다.



자명하지.


당신의 학력,

당신의 재산,

당신의 사고력,

당신의 숨은 배경,

당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여 두려운 미래.


위 모든 것과 관계없이 말이야.



프로젝트가 진심이 되는 순간,

딸린 식솔들은 작은 프로젝트여도 10명,

억 단위 사업이면 100명 이상,

10억 이상의 사업이면 500명 이상,

계열사들을 총괄하는 사람이면 1000명 이상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설렘이었겠지.

하지만 진심이 되는 그 순간,



그래.



기획이 통하는 순간,

대중들의 감정이 내 손끝에서 흔들리는 걸 보면,

짜릿함과 함께 이상한 죄책감이 스치지.


당신네들도 그런 죄책감 속에서 사는 존재들이 아니겠어?


권력은 곧,

명예, 명예는,

그리하여 자본을 부른다지.



진심이 된다는 건

구조가 된다는 것이고,


구조가 된다는 건

타인의 삶을 먹는다는 것이니까.



당연하니까.

확실하니까.

부정할 수 없으니까.

전제조차 필요 없는 인간사 공리(公理, 영어: axiom)니까.



그럼 물어야겠지.


넌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수도 없이 물어왔다.





그럼,

도대체,

이해조차 가지 않고,

한없이 사랑스러우면서,

동시에 두려운 그 인간.




나.




나는 대체,

뭐 하는 종(種, Species)이라는 말인가.














CHAP 01. 감정의 태도

└ 감정은 나를 지우는 도구인가, 만드는 무대인가





지난 6개의 브런치 작품은 내 나름대로 방대한 세계관이었다.


《사랑은 왼쪽으로 스와이핑할 수 있을까?》, 에서는 사랑이 조건이질 않길 바랐고,

《잘못하는 건 불가능해》, 에서는 사랑은 '잘하고, 못하고'의 개념이 아닌 '있고, 없고'의 개념이라 선언하며,

《신이 아니어서, 사랑할 수 있었다》, 에서는 감정의 위계를 초월한 평면을 형성했고,

《공간은 감정의 마지막 주소다》, 에서는 사랑을 믿었다.

《이곳이 낙원이었다》, 에서는 안전이라는 감각의 지속성을 통해 안정감을 말했고,

《권태는 잘 짜인 시스템에서 태어난다》, 에서는 그 지속성이 부르는 권태와 권태가 부르는 위태를 말했다.



무슨 말일까?

고작 사랑 따위나 얘기한 감정 산문일까?



그렇다면,

정말 송구스럽지만,

그건 한계였을 것이다.


당신의.







내가 말한 건,

'삶' 그 자체였다.


학문, 기술, 산업, 경제, 트렌드, 감정, 관계, 사랑, 권력 그리고 자본주의까지 하나하나 해체해 봤지.


철없고,

낮은 실력으로.




이 모든 것은 당신을 향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질문보다 더 큰 여백이 남는다.


'나'라는 종(種)이 회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여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조금은 우스워도

감히 나를 해체해서 발가벗겨보아야 한다.







"나 이만큼 알아. 거의 성불했지. 날 따라야 해"


자신감일까?

아니면 더는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의 고백일까.


만일, '오만함'이라면 채용하기가 꺼려지는 순간일 것이다.


스스로 자기 한계점을 정의한 꼴이니.





"나 이만큼 벌어. 연봉 세후로만 ㅇㅇ인데 또, 배당금만 해도.."


자랑일까?

아니면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버린 고립의 선언일까.


만일, '자랑'이라면 믿음이 조금 내려앉는 순간일 것이다.


스스로 자기 한계점을 정의한 꼴이니.




"나 여자/남자 이만큼 만나봤어. 너 정도는 요리가 쉽지 ㅋㅋ"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소유욕을 숨긴 말장난일까.


만일, '어장 속에 가두려는 시도'라면 미워하기 딱 좋은 순간일 것이다.


나를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고단수가 될 테니.





당신의 자신감은 어디까지가 당신의 것인가?






나는 네가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의 감정 안에서만

내 감정이 실현되는 것을 보며.



나는 똑똑해 보이지 않아도 좋고,

부유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누군가를 이기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저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는 그저 내가 '진짜인지' 알고 싶다.


사랑이건,

분노이건,

질투이건,

욕망이건,


그 모든 것이 '삥이라는 열망'으로 이루어져

꿈조차 꿀 수 없는 시대에서, 나는 여전히 꿈꾸고 싶다.


그것이 구조에 의해 길들여진 연기인지,

아니면 나에게서 맨 처음 솟아오른 원초적 신호인지.



왜,



원초적인 본능은,

늘 내게 공허함을 부르는지.


왜 내가 너랑 다른지.


난 뭔지.





어,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함께하는 이들을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

곁에 있는 이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사람.

대한민국의 가장 시끄러운 곳에서, 가장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으로.











CHAP 02.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

└ 아픔과 겪음이 성장 호르몬을 유발한다는 진리





정말이지 많은 걸 겪어왔다.


진짜 질리도록.


마치 용돈 처음 받아본 아이가 하루 만에 다 써버리듯,

감정도 한동안 누르다 보면 갑자기 넘치게 쓰고 싶은 시기가 오듯,


소위 "늦바람",




그러나,




사실 나는 그 반대에서

이미 권태를 느낀 사람이었다.


도파민이 생성되지 않더라. 더 이상. 아니면 애당초부터.


브런치 지난 회차 말마따나

'도파민 천장'을 살아온 사람인가 보다.



권태를 겪던 자였다.



그래서

아마 내가 많이 외로웠고,


외로웠기 때문에,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법을 배웠나 봐.


우는 것도 솔직히 어느 때는,

"오.. 나 우는 모습 섹시할 것 같아" 라며 즐거워서 더 울 때 있지 않아? (거울 보면 아님)



더 이상 흥미로운 게 없는데,

그러면 혼자 정진하는 것 외에

어디서 내 공허를 채울 수 있겠어.


당연히 없었겠지.






나,



아팠나 보다.

아팠는데 내가 그게 아픈 줄 몰랐나 보다.

그래서 병원을 가지 않았나 봐.

아까운 실비보험..



겪었나 보다.

겪었는데 내가 그게 겪은 건 줄 몰랐나 보다.

그래서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나 봐.

근데 따르는 사람이 생겼으니 이건 이득이군.



나 달라졌나 보다.

내가 그동안 글에서 써온 진리들의

이면에서 존재해오다 보니까

그 고백들이 나를 달라지게 했나 보다.







아,

성장 호르몬 나왔더이까.










CHAP 03. 감정의 반사 신경

└ 나는 누군가의 감정에서만 존재하는 존재인가





누군가의 감정에서만 존재하는 존재라는 말은 자칫 '죽은 이'를 상징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는 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논리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철학을 논할 때 주저 없이 말하는 그의 키워드는 현존재(Dasein)이다.


존재란 스스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세계-속-존재이며, 죽음의 자각 속에서만 진정한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거지.


그의 사명과도 같은 말이잖아.

"존재는 홀로 있지 않는다. 존재는 드러남이요, 열림이며, 출현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봐도 그렇다.


관측되기 전까지 그 존재는 '확률'로서 존재한다.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중첩 상태로 가정된 고양이가

상자 안에서는 '죽은 상태+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하는데

누군가 상자를 여는 순간 확률은 하나로 붕괴된다는 것이다.


즉, 존재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럼 난 뭔가.

증명된 논리에 의거

나는 관측되기 이전까지 확률로서 존재하다가

관측되는 그 순간 현존재(Dasein)가 된다는 것 아닌가?




뭐,

반박하자면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었고,

양자역학에서 '관측'은 철저히 수학적/물리적 행위였으니


그리하여


존재는 주관의 조건이지,

타자의 시선이 아니었으니

내 이론은 타자 의존형 존재론으로 해석되고,

실존주의의 자유 개념과 충돌되어 정면반박당하고 손가락질당하겠지.





근데 아니다.


진리를 해석하면서도,

감정을 해석하고 번역하지 못하면,


나는 죽을 것 같거든.


살아있는 사전이 아니라,

살기 위해 생각하는 사람이고 싶거든.





그러다 보니까

내 공부 스피드가 늦나 보다.




나 암기과목 100점은 자신 있는데

죽어도 암기가 싫더라고.










off-topic. 아니 잠깐만,

└ 닮은 결(結) 맞는 격(格)





내가 '관측', '타자'에 의해 존재한다는 논리는 단지 철학자의 말을 인용한 게 아니라,


우리가 현실 속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이야기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체화하기 위해,

나를 바라봐주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거울처럼 나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장 정확히,

가장 따뜻하게 비춰주는 사람들은 결국 나와 '결'이 닮은 이들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

동성상응(同聲相應)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결'이 닮은 사람들 안에서 비로소 안정을 느낀다.



왜?

가진 돈이 닮아서?

비슷한 대학교, 비슷한 직장,

혹은 비슷한 상처 하나쯤 있어서?



단순히, 그런 표면적인 겉핥기식으로 우리가 관계할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사건'을 겪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는 같은 사건을 통과한 사람들,

같은 가치관을 겪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 가치관은 고정된 것은 아니다.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우리의 인간관계도 재편된다.

20대, 30대, 40대의 '무리'가 달라지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일지도.



사건은 충격을 낳고,

그 충격은 때로 낯선 설렘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설렘은,


실은 오랫동안 갈망해 왔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결'의 조각일지도 모르겠다.


결이 통하는 것을 인지하는 자는 격(格), 위(位), 선(線)마저 맞춰진다. 의도하지 않아도 맞춰진다. 자석처럼.




결은 물리적인 외모나 몸, 출신 등이 아닌,

"함께 변한 경험의 패턴"이라는 정의로 새롭게 해석되는 거잖아.



맞잖아.

그럴 거잖아.

아마 내가 맞을 걸.

(ㅋㅋ 주장 3단 강요 미안합니다)







부모들은 왜 '학군'을 따지는가.


사실, 자기 자식이 '열망' 하나만 있으면 공부는 충분히 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본능적으로 학군을 따지게 되는 근원은


단지 성적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 '결'에 맞는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가 만나는 '공기'가 결국 아이의 감정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학교 안엔 언제나 유혹이 있다.


학교가 노는 아이들을 방치하면

같은 반에 노는 아이 3명만 있어도

1년 뒤면 그 반은 다 같이 노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학교가 계속해서 관리하려고 노력하면

같은 반에 노는 아이가 3명이 있어도

1년 뒤에도 5명 이상으로 늘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노는 아이'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들이 '분위기'가 되느냐,

아니면 '소수'로 남느냐는

관리의 차이인 것이다.



유혹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관리를 통해 '번짐'을 늦출 순 있다.


그건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혹의 방치는 '번짐'이 쉽고

유혹의 관리는 '번짐'을 그나마 덜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좋은 학교'를 찾는 게 아니라,

'좋은 결'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자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부는 혼자 할 수 있어도,

결은, 같이 숨 쉬고 함께 겪으며 살아야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CHAP 04. 감정의 병렬 회로

└ '나'는 단선으로 흘러가지 않는 인간인가 봐





진짜 수천만 번 외롭고,

수억 시간을 공허 속에 살아왔다.



폰에 연락이 넘치고,

전화 한 통이면 무리가 형성되는데,



진짜 수천만 번 외롭고,

수억 시간을 공허 속에 살아왔다.



'이건 성호씨 때문에 특별히 챙긴 거예요'

'성호님 일로 오세요 ㅋㅋ'

'삥이님 이거 어떻게 해요?'

나를 찾는 사람은 많고,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들 다 돈이었을 텐데,



진짜 수천만 번 외롭고,

수억 시간을 공허 속에 살아왔다.





나는 단선으로 흘러가지 않는 인간인가 봐.


나는 자본주의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런데 꿈을 꾸고 있는 걸 보면 또 삶을 사랑하나 봐.



살고 싶거든.

존재하고 싶거든.

욕망을 넘어서 열망하거든.




그래서 내가 배운 건,

'너'를 사랑하고, '우리'를 지키는 방법에 대한

지하 암반수를 뚫는 사유의 깊이였다.



당연히 정답 따위 도출되지 않는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확률은 나온다.

근데 확률이 삶에서 정답으로 작동하는가?



'그 사람'은 심리학으로 손바닥 위에서 굴릴 수 있는데,


'당신'은 어떤 학문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진다.


심리학, 철학, 인문학, 경영학 다 때려 박아도 해석조차 불가능하다.


다 틀릴 수도 있다는 변수 하나가 너무 무섭잖아.




그래서 나도 해석이 안된다.



내가 '귀신'이라고 단어 하나만 생각해도 내 눈에 귀신이 보이는 뇌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만큼 나라는 인간은 유동적 존재고,



그래서

단선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병렬 구조로 짜인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아마,

평생을 물어도

내가 얻지 못할 해답은




'너' 그리고 '나'

그래서 '우리'가 될 것 같다.











자,

생각해 보자.



왜 내 존재가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가?




아마두,




그것은 이미

'존재'가 형성된 물리적 실체를 갖췄기 때문 아닐까?


우리 어머님, 우리 아버님,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가 나에게 삶을 주셨잖아.


난 그때부터 이미 존재였어.


현존재 말고 실존재.

성찰하는 존재 말고, 그냥 이미 실존하는 존재.




그럼 결국,

내가 타자의 시선에 관측되는 이유는


사건 발생 확률이 아니라

사건으로 이미 존재하기 때문 아닐까?



그래,



내가 나를 마주할 용기,

내가 나를 사랑하는 자존,

그래서 내가 나를 아끼는 미덕 없이

어찌 다른 이의 시야에 관측될 수 있겠어.







그럼 난

관측을 기다리는 입자이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 빛을 내는 파동이었나 보네.










나 겁나 멋있는 사람이었네.







나 차은우였네.

(미안합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야.

당신은 누구야?





난 오래전부터,

그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책상에 물 떠놓고 앉아 있었다구.








차은우 드립 진짜 싹싹 빌 테니까 악플 달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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