뾃, 뾆, 쀏, 쀒

관능은 손이 가고, 권능은 무릎이 꿇린다

by 삥이



어느 날, 한 남자가 출근하듯 재판장에 들어선다.

차를 몰고, 넥타이를 매고, 말끔히 앉는다.


그리고 읊어진다.

"600만 명 학살을 비롯한, 15개의 죄목."


역대 최악의 쓰레기이기 이전에,

역대 최악의 '멍청이'.




악은 그렇게, 평범하게 온다.





<Ólafur Arnalds - re:member>






1961년,

이스라엘 최고 법정에서

사형 선고 판결이 내려지는 장면이

대한민국을 포함 전 세계에 송출되던 어느 날.


유대인 600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유대 민족에 대한 범죄.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8조 '집단살해죄'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 및 살해, 강제이주, 고문, 노예화 등.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인도에 반한 죄'


기타 제네바협약 위반에 대한 전쟁범죄,

고문 및 기타 잔혹 행위에 대한 국제인권법 위반,

공모 및 교사죄, 직권남용죄, 직무유기죄,


정책 실행자 이상의 계획자이자 기획자였던

20세기 역대 최악의 범죄자 중 한 명,


나치의 그림자 아래,

사유 없는 복종을 선택한 한 인간.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그리고,

그를 재판장에서 지켜보던 정치철학자 한 명.


한나 아렌트.


그녀가 말했지.

"그는 악마는 아니었어. 다만,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았을 뿐이지."


바로 그때부터였을까.


그 순간, 인류는

'악(惡)'이라는 단어를

괴물에서 '평범함'으로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





Banality of Evil(악의 평범성).


악은 괴물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지 않는 자의 습관에서 비롯된다.


사유하지 않는 사회는

고통을 '지시사항'으로,

생명을 '보고서'로 치환해 버린다.

그리고 전쟁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럼 하나 묻자.

지금 당신이 머무는 그곳은, 평화로운가?





하나 더 묻자.

이 글이 단지 역사적 재판을 서술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필자도 기업에 없는 사유를 넣는 역할을 도맡아왔고,

아마 미래에도 그런 특명 아래에 업무를 이어갈 것이다.



서울로 향하기 3초 전,

'생각이 삭제된 공간에, 사유를 심어라.'



생각 없는 사회는 결국,

진심도, 감정도, 고통도 지워지기 마련이라지.



Hannah Arendt (한나 아렌트) / ⓒ Jenny Connected - WordPress.com






01.

생각은 혼자 해야 하지만, 연결되어야 한다.




21세기,

2025년,

대한민국은 제21대 대통령의 1년 차를 지나고,

AI는 AGI를 넘어 감정을 흉내 낼 줄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는 실시간 연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카톡 한 줄,

이모티콘 하나,

게시물 하나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대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닿아 있지 않아."



어째서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서 찾았던 인물이었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유는 고독을 전제하지만,

그 고독이 고립으로 번지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녀는 고독(solitude)과 고립(loneliness)을 엄격히 구분했다.


고독은 나와 나 자신이 대화하는 시간. 생각이 자라는 방.

고립은 타자와 의미로부터 단절되는 상태. 생각이 말라가는 방.


그녀는 공적 삶을 중시하던 여성이었다.


사유는 '나 혼자만의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곧 타자와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믿던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이 오늘 쓴 그 글은

'내 안의 고립된 독백'인가,

아니면 '누군가와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인가?





사유는 결국,

누군가에게 '나도 그래'라는 말을 듣기 위해 존재한다.




한 사람이라도,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그건 고립이 아닌 고독이다.



그리고 그 고독은

생각이 살아 있는 신호다.















02.

당신은 왜 누군가의 고통을 못 알아차리는가




당신은 왜 누군가의 고통을 못 알아차리는가,


그리고,


나는 왜 당신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고대 그리스),

토마스 아퀴나스(Tommaso d'Aquino, 시칠리아 왕국),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오스트리아 공화국),

시몬 베유(Simone Weil, 프랑스 공화국),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프랑스 공화국),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 왕국)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국)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독일 연방 공화국)


그리고

모든 고통의 본질을 통과한 사유의 아이콘,

가우타마 싯다르타(सिद्धार्थ गौतम, 사캬국-말라국).


내 브런치에서 인용된 성현(聖賢)들의 총집합되시겠다.


위와 같은 성현들,

그리고 언급되지 않는 모든 위대한 자들은 항상 같은 말을 읊조린다.



그래, 지겹지.

또 '사랑'이야.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수학에서 무한은 가장 정교한 수(∞)이며,

철학에서 무한은 존재와 경계의 사유 대상이고,

물리학에서 무한은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신학에서 무한은 전지(Omniscient), 전능(Omnipotent), 그리고 무소부재(無所不在)다.



그래,


사실 내가 당신의 고통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는,


당신이 내게,

무한이라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수치로 셀 수 없는 자.




당신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적 있을 것이다.



누군가 울고 있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웃고 있었을까.

왜 나는 그 눈물을 눈물로 보지 못했을까.

왜 그 사람의 '괜찮아'에서 도망쳤을까.



그리고,

왜 내 '괜찮아'는 그렇게 아무도 읽지 못했을까.





사유하지 않는 사회는 그렇게,

슬픔을 낭비로 여기는 때가 있더라.

고통을 생산성 없는 감정으로 취급하기도 하더라.



"아직도 그걸로 힘들어?"

"그만 좀 우려먹지 그래?"

"다 지나가, 신경 끄고 일이나 해."



그래,

우린 언제부터인가,

타인의 감정을 해석하기보다,

무시하는 법을 먼저 배웠는지도 모르겠어.



당신을 이해하려 애쓰던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디쯤에 멈춰 서 있더라고.











03.

한나 아렌트




악은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자의 반복된 무심함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저 피곤해서,

그저 바빠서,

그저 상처받기 싫어서,

그리고 그 책임이 너무 버거워서,


누군가의 눈물을

조용히 외면해 본 적이 있다.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의 무심함은 곧

삶의 태도가 된다.


"이건 옳은가?"

"나는 왜 지금 아무 말도 못 하는가?"

"그의 고통을 보는 나, 나는 괜찮은가?"


그 물음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해석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


그리고 해석되지 않은 고통은

그 사람의 존재마저 지워버릴 수 있다.



너무 무서운 일이지.



내가 그 슬픔을 외면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 사람은 조금씩 이 세계에서 지워지는 중일지도.



눈물이 소음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라면,

사랑은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한 번만 귀 기울이면 될 텐데,


소음이 아니라 '훌쩍훌쩍 쓰읍.. 킁..!(코풀기)'의 작은 외침이었다는 것을


한 번만 귀 기울이면 알 텐데..





그러니 묻자.

당신 곁의 누군가가 무표정해졌다면,

그건 참아온 감정의 침묵이 아니었을까.



웃는 얼굴 속에,

사실은 오래전부터 울고 있던 얼굴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그리고 당신은,

몇 번쯤 타인의 마음을 오독했는가.



그리고,

몇 번쯤,

당신의 마음이 읽히지 않아 외로웠는가.













04.

뭐가 그리 두려운가




신체의 끝에 도달한 관능,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감각의 최전선, '촉각·시각·청각'이 흔들린다.


그리고,


사유와 지성의 끝에 도달한 권능,

인간은 스스로도 모르게,

존재부터 떨림을 느끼며 절로 무릎을 꿇는다.



관능과 권능의 사이 어디에선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이 두 축 사이에서 후달거리며,

유혹과 진리를 동시에 마주하기 위해



그래서,

권능이라는 열매를 쥐기 위해 뱀의 혀에 감긴다.



그렇게,

뱀의 혀에 속은,

감히 무지의 탈을 쓴 자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낙원)에서 쫓겨난다지.




두 번째 인간, 하와(חַוָּה).

당신이 쫓겨난 그 인간이잖아.








왜,


우리는


1천만 원이 3천만 원으로 증가하는 '자산 증가'를 갈망하면서


1천만 원에서 투표받는 사람으로 향하는 '지식의 복리'는 너무 어렵고 멀게만 느낄까.



우리는,

뭐가 그리 두려워,

사유를 멈추게 되는 것일까.



지식은 복리로 쌓이더군.

한 번 사고력과 문해력, 판단력을 키우면

이후 모든 선택이 더 빨라지고 정확해질 수 있다지.


자산과 달리 잃어버릴 일도 없고,

외부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안전자산이 된다지.



정치인이든,

기업의 리더이든,

의뢰인을 이끄는 컨설턴트든,

결국 모든 기획은 '판단력'에 기반하고,

그 판단력 하나로 돈의 크기를 좌우한다.



그래,

너무 당연하잖아.

아니 진짜 당연하잖아.



지식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설득이고,

설득이 곧 권력인데,


그럼,

돈은 어쩌면 그 설득을 따르는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했다.


사유는 '노동'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생각은 가만히 앉아있으면 되는 일이라 믿었는데,



진짜 사유는

체력, 인내, 고통을 동반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어.



'진리는 단순하다.'

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이

당연히 믿기지 않겠지.


뭔가 대단한 공식이 있어 보이겠지.

꼼수가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력이 있어 보이겠지.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함은 심오함이고,

그 단순함을 무시하면 결국 무지해질 것만 같다.








한나 아렌트,

당신이 저격한 것이

바로 이런 세상이었더이까?






유부남이었던,

스승을 사랑했던 당신도,

그 스승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의 연인을 사랑하기 위해,

당신의 내면을 끝없이 파고 가다가

그렇게 역사책에 이름 한 줄 남기셨나이까.







관능은 '지금'을 떨리게 하지만,

권능은 '존재 전체'를 흔든다.








그래서 인터넷에 이런 게 유행이었나?



"예쁜 여자를 만나면 3년이 행복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면 30년이 행복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3대가 행복하단다.


잘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3시간 동안의 행복이 보장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통장 3개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를 만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단다."



사람들은 여전히

권능과 관능 사이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행복의 보장을 사유가 아닌 조건표로 찾고 계시는가 보다.



끙.. 난 그런 거 잘 몰게따앙









필자 삥이,

될 수 있다면,


현세(現世)를 위해 관능을 잡고,

내세(來世)를 위해 권능을 좇아,



내 삼세(三世)를 누려보리다.




그리하여,

당신의 무한(∞)을 빌겠나이다.














05.

뾃, 뾆, 쀏, 쀒




여기까지 읽은 독자님들,


인터넷 오류 난 줄 아셨더이까.



사실 한글에서 가장 획수가 많은 한글이라고 합니다.


가장 획수가 많은 한글인데 가장 단순하고, 뜻이 없습니다.


심지어 한때는 '유행어'로서 대한민국 널리 사용되었죠.


가장 뜻 없는데,

가장 웃기게요.


무슨 말일까요.

그만큼 단순하다고 하더군요.



진리가요,

뻑이가요,

아니 손이가요.



장난이고,

진리가 그렇다네요.



저는 돈이 아닌 진리를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라는 껍질을 벗기고 나면,

늘 당신이 머물고 있더군요.





그게 진리인 듯합니다.
















이쯤에서 오늘은 키보드를 놔야겠다.


이미 너무 많은 글을 써버렸어.


이렇게 너무 써대다가는,

내가 너무 드러나고 말 거야.





그런데,

읽히는 게 좋으니까

조금은 더 써봐야겠어.

(ㅋㅋ)








한나 아렌트,


어쩌다 마주친 당신 덕에

오늘의 사유 소스를 얻을 수 있었어.


그 권능에 대단히 감사해.

(마주치면 존댓말로 말씀드릴게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의뢰인을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직원들을 보듬어주는 사람으로,

엄마아빠의 아들로,

동생과 하지의 오빠로,

너희들의 친구로 살다 보니까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면,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진리였어.








그거 하나 겨우 깨달았어.


사람이 이제는 120년 가까이 산다는데,

그 인생의 25%를 겨우 채워가는 내가 깨달은 게


겨우 이거 하나야.







깨달은 자,

또는 눈 뜬 자라는 의미를 가진

붓다(Buddha).






오래된 내 꿈,


내 모든 것을 걸고,

내 모든 지식과 자산과 감정을 쏟아

끝없는 여정을 왔다링~ 갔다링~ 하고픈 그 낡은 꿈.


여정을 마치려면

열정을 쏟아야겠네.







아,

이게 '붓다'인가.






한 번 부어볼까?



한 번, 진짜로 부어볼까?












아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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