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형이 뭐예요?
"이상형이 뭐예요?"
사람을 만나면,
특히 조금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꼭 듣는 질문이다.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망설인다.
'모라고 대답해야 하지.. 없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내 이상형은..
키, 몸무게, 목소리, 머릿결..
아니면 직업..?
지금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이상형을 가진 적이 없던 아이인가 보다.
그저 반응한 적만 있었을 뿐.
내가 좋아한 건,
'내가 생각하던 형상'에 맞춰진 퍼즐이 아니라,
그냥 울퉁불퉁한,
그 자체로 이상한 모양의
어떤 퍼즐 조각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검정치마 - EVERYTHING>
"와, 이 친구 TV 나오는 ㅇㅇㅇ 닮았다. 꺄르륵"
대전광역시 동구 삼성동,
그곳에 위치했던 현암초등학교는
1, 2, 4, 5학년이 같은 건물을 썼는데
교실에서 도서관까지 이동하려면
커다란 다목적홀을 지나가야만 했다.
어릴 적 나는
공룡책, 역사책, 세계사 이야기,
과학책, 동물 이야기 등을 주로 읽었다.
항상 도서관을 출석하듯이
개근하던 나에게 큰 관문은
바로 그 큰 다목적홀이었다.
그곳은 소위 '무서운'
5-6학년 형, 누나들이 상주해 있었고,
그곳을 지나가려면 좋든 싫든
뭔가 관심을 받아야만 했다.
"바퀴벌레같이 생겼네 ㅋㅋ"
대전광역시 동구 삼성동,
그곳에 위치했던 보문중학교.
내가 중학교 1학년 즈음이 되었을 때
중간-기말고사를 보기 위해서는 학년 별로 섞어서 시험을 봤었다.
1학년 중 절반은 2학년과, 절반은 3학년과,
2학년도 절반은 1, 3학년과 찢어져 시험을 봤다.
그때는 2, 3학년 형들이 무서웠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즉, 여름방학이 오기 전 어느 더운 날.
위아래 파란색의 하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서 과학 시험 준비를 위해
앞자리 친구와 서로 암기한 것을
시험 보듯이 낭송하던 우리에게 옆에서 어떤 형이 말을 걸었다.
"이 새끼들 바퀴벌레같이 생겼어 ㅋㅋㅋ 야, 야, 야, 앜ㅋㅋㅋ 모여봐."
무서웠다.
심장은 두근거렸고,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빨리 시험이나 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었다.
시험은 잘 봤던 것 같은데,
2개 틀려서 90점 맞은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워딩은
"바퀴벌레" 그 단어뿐이었다.
"야, 성인 돼서 피부관리해"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대전에서 나름 알아준다는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내 동기가 아마 전국 0.1% 성적을 받았는데,
의대가 아니라 그냥 공대를 꿈꾼다고 해서
선생님들이 골머리를 앓았다고도 하더라.
근데 그 친구가 해외축구 광팬이었다는 것을,
선생님들은 아셨으려나 모르겠다.
왜, 그 친구는 선생님들에게 '정해진 이상형'이 되어야 했을까.
아무튼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의 영향을 받아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나름 왁스도 발라보고,
반곱슬의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 고데기는 필수,
그리고 피부를 위해 선크림도 자주 발랐다.
아마 그 버릇이 군생활까지 이어진 듯싶다.
(나름 피부 선방하며 사는 중)
그래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여름에는 항상 선크림을 바르고 다녔는데,
당시엔 190cm쯤 되어 보였던,
지금 생각하면 그보다 작았을지도 모르는 그 친구.
어느 날 갑자기 내 뺨을 치더라.
놀래서 안 아팠어.
"야, 성인 되고 발라 그런 건"
그날, 아프지 않았던 건 정말 놀라서였을까.
아니면, 그 이상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던 걸까.
음,
그런데 20대 이후에도
여전히 이 동네에 사는 나를 두고
위계를 형성할 만큼 담대한 아이는 없던데,
그때는 왜 그런 식의 말들을 매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분위기가 '형'처럼 느껴지던
사람들이 많더라.
그 형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던 그 시절,
당시의 소년이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청년이 될 줄 몰랐던 그때.
어머님이 항상 말씀해 주셨다.
"성호야, 싼 옷을 입더라도 항상 깔끔하게 다니는 게 최고야. 지저분해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널 얕볼 수도 있어."
그래서인지,
뷰티와 패션에 관심이 늘 많았고,
내 모습이 곧,
다른 이에게 '예의'로서 다가갈 것이라는 신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이다.
지금 와서야,
동창들이 내게 만나자고 내 번호를 알아내고,
지금 와서야,
나무위키를 본 학교 후배들이
"삥이님 학교 후배 DM 남깁니다��"
이러고 있지만,
그때에는,
도서관 가는 시간만 기다렸고,
방학이 오기를 기다렸고,
조용히 암기할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오기를 원했어.
나는 여름이 되면 조금은 쳐진다.
땀도 쉴 새 없이 나고,
애써 꾸민 머리와 옷이 젖어서
스스로 위축되어 버린다.
성인이 된 이후,
더 이상의 평가를 받지는 아니했는데,
상황이 만드는 묘한 분위기들이
나 스스로를 재단토록 만들었나 싶다.
의도적으로 남들로부터 눈을 돌렸다.
네가 예쁜지, 네가 잘생겼는지,
네가 컴퓨터를 잘하는지, 네가 무슨 알바를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생각해 보니 애당초 관심이 가지도 않았나 싶다.
사실,
고등학교 진학 이후부터
말도 안 되리만큼 발은 넓어져 있었다.
밝은 분위기가 좋았고,
내가 웃기다는 그 분위기,
내가 있으면 무섭지 않다는 그 반응들이
나름 만족스러웠다.
동시에,
내가 그렇게 의지했던 이들이 있나 싶다.
"네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 오늘 모임 나와"
라고 전화를 거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어?"
"네가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 나올래?"
라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기억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남들로부터 눈을 돌렸다.
삥이야, 너 따위가 남을 함부로 재단해선 안돼.
여전히,
각종 단톡방에서 사람들이
조금은 부끄러운 말들을 안주삼을 때
나는 여전히 그 대화들만은
모른 척하며 지내고 있다.
끼어들지 못했다기보다,
내 마음속 무엇인가의 윤리 브레이크가
세게 눌려 급정거하는 것처럼,
밀어내는 방식으로.
나는 단 한 번도 사람을 지칭해서
'야'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동물, 식물, 먼지,
하늘 아래에 바다 위에 있는
그 모든 것을 향해
'야'
'너'
'니 새x'
라는 말을 내뱉어보지 못했다.
어느 날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개미 병정들의 행렬을 구경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재밌음)
그들을 향해서도 '야'라는 말을 내뱉어버리면
나도 모르게 주위 눈치를 보고 있더라지.
나보다 더 모르는 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이,
'결핍'을 인정하지 못하고 울던 이,
"그래, 너 새x야 잘났다" 라며 내 멱살을 잡던 이,
그런 사람들과
이제는 1c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을 때도
더 이상, 심장은 두근거리지 않는다.
외려 비웃지도 않고,
되려 울지도 않으며,
그저 한 마디 건네는 게 익숙하다.
"선생님, 진정해요. 저 당신 편입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무너져 내리더군.
대체 어느 누가,
진짜 남을 상처 주고 싶어서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싶어 하겠어.
말하지 못한 침묵의 나날들이,
그 사람들을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잖아.
괜찮아,
내 멱살은 10원짜리보다 가치가 없고,
당신의 눈물은 다이아몬드보다 무거운 무게로 땅에 떨어지고 있으니까.
당신은 언제나,
내 위에 존재하는
그저 존재야.
말의 힘을 아는 자가,
말로 인해 남을 무릎 꿇리면,
그건 되려 모르는 자다.
때문에 내가 먼저 다쳐봐야 안다.
내가 내뱉은 말이 가시송이가 되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상처받아보아야 알 수 있다.
내가 그 말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아프지 않고 같이 웃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내가 누군가를 '야'라고 부르는 건
곧,
내가 어느 날 아파했던 그 감정을 반복하는 아주 어리석은 짓일 테니까.
내가 누군가의 눈을 피할 때,
어떤 사람만큼은 자꾸 피할 이유를 못 찾겠을 때가 가끔 있다.
진짜 가끔,
아니 어쩌면 거의 없었던 것 같기도.
ㅋㅋㅋ 아무튼,
어떤 사람은
나를 보며 웃지도 않았고,
나에게 칭찬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눈빛이 따스해서,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외려 과잉이 되는 순간이 있다.
떨리는 감정에
말을 더듬고,
손을 떠는데,
못 본 척하는 건지
기다려주는 것인지 싶은 그런 태도.
내 귓불만 붉어지더라지.
그런 사람은,
정말 만나기 힘들다.
큰 공을 들여도,
평생을 무릎 꿇어도,
운명의 장난 앞에
신들이 휘저은 파도 아래에
흩어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런 이들을 보면,
가끔 운동을 하다가도 생각이 든다.
'그분은 진짜 어른 같아.'
그런 사람은,
진짜 몇 없다.
그런 이들은 보통
형도,
누나도,
리더도,
대표도,
부모도,
친구도,
TV 속 어느 성현도 아닌,
그냥 사건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냥 그랬다"처럼 무심코 존재한다.
평범한 게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을 줄은.
그냥 그런 사람,
그런 평범함이 나에겐 정말 기적 같더라고.
"있잖아"
라며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이들이 있다.
그럼 이제, "응 뭔데?"라고 대답하면,
100줄짜리 소설을 '듣듯이' 장대한 스토리가 쏟아진다.
일명 투머치토커.
말이 많은 사람들은 정말 천성이
'박찬호'처럼 말이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닐걸.
그들은 선택한다.
말을 많이 해도 되는 상대,
그리고 말을 아껴야 될 것 같은 상대.
그래서,
"있잖아"
라는 문장 뒤에 늘 '~(물결)' 표시가 붙는다.
감정을 해소하려는 목적
혹은, 감정을 공유하려는 목적 중
무엇일지 알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말하고 싶다는 감정을 담고 있다는 전제는 동일할 테니.
그래서 보통,
"있잖아"로 시작되는 문장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이상형'이라는 단어를
처음부터 다시 정의하게 된다.
내 안의 감정이
부끄럽지 않게 흘러갈 수 있는 구조를 가진 사람.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Louis René Deleuze)는 말한다.
"사랑은 사람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들어낸 '관계의 구조'에 반응하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말한다.
"신의 사랑은 조건부 수용이 아닌, 존재에 대한 허용이다."
그래,
내가 이상형이라는 질문에 대해
늘 '노잼 우~~~'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건 아마,
아마 내가 그런 '이야깃거리'에 감정을 담지 못했기 때문인가 봐.
외모, 직업, 조건이 아니라,
내가 '벌거벗은 말'을 할 수 있어도 괜찮은 사람.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가 긴 문장을 흘리더라도 끝까지 듣는 사람.
그래서 이상형은 곧
모두가 바라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줄도 몰랐지만 사건처럼 나타나는 "그냥 그랬다" 싶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이래도 괜찮은 사람'은
태초부터 그 사람이 그랬던 존재여서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더 따져보면,
그 마저도 내가 만드는 구조일 수도 있다.
인간의 대화 속 코드에는 수학도 존재한다.
A가 나가면, B가 나오고, C가 내뱉어지면 F(uck you)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듯이,
마치 알고리즘 속 세상처럼,
마치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처럼,
그 따스한 관계는 '그 사건'을 당한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나의 '능동적 태도'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그냥 그랬다" 싶은 존재가 되어서
서로만의 유토피아를 만들더라지.
아,
그래서 보통
잘 만난 커플들이나
잘 사는 부부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부럽다'라는 말을 내뱉나 보다.
이상형이 되어버린 사람들끼리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 장면은
보통의 시간이
아닌 것 같고,
보통의 감정이
아닌 것 같아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저 조용히 말하게 된다.
"보통 아우라가 아니야."
이상형은 늘
멀리 있는 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가까운 호흡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태어나서'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받아들일 줄 알아서 형성된 존재였을 수도 있다.
너네 아우라 장난 아니야!!
???: 아, 우리..?
사람은 아쉬운 동물이다.
'내' 감정도 모르면서,
'네' 감정을 듣고 싶어 하니.
사람은 아쉬운 종(種)이다.
'나'와 '너' 사이 감정은 모르면서,
제3자 커플의 감정은 심리학 박사처럼 꿰뚫으니.
우리는 안타까워서
그래서 안타깝고,
그리하여 안타까운 존재이다.
이상형을 갈망하면서,
정작 내가 누군가의 이상형이었는지에 대해선 늘 묻지 않은 채 지나간다.
내가 서있던 그 공간 때문에
그 공간이 밝아진 적은 있었을까.
내가 말했던 그 순간 때문에
그 순간이 안정된 적은 있었을까.
내가 안았던 그 품 때문에
그 품이 따뜻하게 달궈진 적은 있었을까.
내가 그저 존재했기 때문에,
내 존재가 감히 빛이 된 적은 있었을까.
누구를 다치게 하진 않았을까.
다치게 했을 거야.
울진 않았을까.
울었을 거야.
아프진 않았을까.
아팠을 거야.
참진 않았을까.
참았을 거야.
무너지진 않았을까.
무너졌을 거야.
숨기진 않았을까.
숨겼을 거야.
지치진 않았을까.
지쳤을 거야.
나 때문이었을까.
나 때문이었을 거야.
그러고도 난,
괜찮은 척했을까.
괜찮은 척했을 거야.
아무 일 없단 듯 웃었을까.
웃었을 거야.
눈물이 말라버렸을까.
말랐을 거야.
외려 나보다 더 괜찮은 척했을까.
그랬을 거야.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아니, 못 했을 거야.
당신이 당신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한 번이라도 말했을까.
그리고,
당신이
온전히 당신으로 있어도
괜찮다는 해답을 전달해 준 적은 있었을까.
그랬으면 좋겠을 텐데.
그냥 한 번쯤
그랬다고,
나로 인해 마음이 덜 무거워졌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을 텐데.
그냥,
내가 존재했던 자리가
아주 잠깐이나마 편안했었다고
나중에라도 털어놔줬으면 좋겠을 텐데.
어제는 내가 잘 몰라서
오늘은 다르다고
더 잘 말할 수 있으면 좋겠을 텐데.
나도 언젠가는
"그냥 그랬다" 싶은 사건이었으면 좋겠을 텐데.
나도 어느 날은
'있잖아'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을 텐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을 텐데.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야'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새x'라고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소리 지르듯이 멱살잡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자기를 미워할 때 나는 같이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말이 많아질 때 끝까지 들어줄 것이다.
누군가 피를 흘릴 때 나는 닦아줄 것이다.
누군가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때 나는 그 옆에서 소리 내어 울 것이다.
"너 뭐야?"라는 물음에
"그냥"이라고 일관할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에는 나도 누군가와 사부작사부작
유토피아 만들기 소꿉놀이를 완성하고 있을지도.
모래성 만들기 완성 박수 짝짝.
무너지면 다시 만들면 되니까.
평생을 만들게 될 거니까.
어느 날엔 2층,
어느 날엔 3층,
어느 날엔 안시성,
어느 날엔 두개의 탑,
어느 날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어느 날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박지성.
"이상형이 뭐예요?"
사람을 만나면,
특히 조금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꼭 듣는 질문이다.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망설인다.
"제가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요.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자신 있게 말씀드릴게요."
아,
내가 남을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나 보다.
그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게끔,
그 사람이 자기 말을 덜어내도 괜찮게끔,
그 사람이 울고 있어도 숨기지 않아도 되게끔,
기쁜 날은 더 기쁘게 증폭시켜 줄 수 있게끔,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진해서,
미처 내가 바라는 소망.
이상형을 어딘가에 적어볼 생각을 못해봤어.
괜찮아,
이상형은 이미 '된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 어디쮸까 말고,
그런 사람 여이뜹니다 로서 살아봐야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