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머묾이다
두서(頭緖)가 먼저 달아난다.
말이 먼저 숨을 쉬고,
나는 그 숨을 따라가며 기록하였으니,
저 별은 몇 해를 가도 제자리더라.
바람이 꺾여도, 계절이 같아도,
그 자리에서만 빛을 뿜더라지.
아,
그곳은 북극성과 같이
보지 않고도 자연히 이끌리듯이,
관성이 이미 내 몸에 붙었네라.
<나의 해방일지 OST 모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망설이는 사이, 계절은 넘어가고,
몸은 그 흐름을 따라 약해진다.
사람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주저와 침묵 사이의 여백은
멀리선 미(美)로 보이나,
가까이서는 놓침의 연속인 비극인 때도 있다.
설렘은 더욱이 잔인한 녀석이다.
불 붙이기를 머뭇거리는 동안,
이미 타버리고 흔적마저 없다.
소방 체계를 세우는 사이,
한스럽게도 바람이 불길을 번진다.
시간, 사람, 설렘.
선택이라는 압박을 들이밀며,
잠깐의 여지만 주고 결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사람은 두려워도 전진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단 하나는 기다린다.
사랑.
억겁의 시간도 서서,
너무나도, 자연히 머리를 조아리는 감정.
마치 무리의 길을 트는 코끼리의 가장 연장자처럼.
마치 손주에게 무한한 신뢰와 장난을 건네는 조부모님처럼.
그리고 가끔,
그 기다림 속에서만 이어지는 대화가 있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끝까지 들어주는 몇 안 되는 순간.
2025년 5월 12일.
필자는 이 현상을 두고
'ㅅ의 법칙'이라고 지어냈더라지.
그런데,
셔츠 단추를
첫 구멍에 잘못 꿰면,
옷 전체가 비뚤어지듯
욕망도, 열망도, 그릇되면
절망으로 기우는 때가 있다.
욕망은 가지려는 마음,
열망은 높이 오르려는 마음.
그러나, 방향이 비틀리고,
둘이 합쳐져 과열되면,
욕망이 외부 인정에만 향하면,
열망이 비현실적 완벽을 향하면,
그러니까, 둘이 합쳐져 과열되면,
망은 세 가지 얼굴을 갖는다.
망에 걸리고(網),
자기 소멸로 이어지고(亡),
망상에 빠진다(妄).
필자는 이 흐름을 두고
선망망절(善望妄絶)이라고 부른다.
'바른 바람, 어긋난 바람, 그리고 끊어진 바람'이라는 뜻이다.
바른 바람은 건강을,
어긋난 바람은 파멸을,
끊어진 바람은 절망을 남긴다.
그래서 첫 단추는,
바른 바람을 잡되,
어긋난 바람은 피하고,
끊어진 바람은 붙잡아 주는 자리다.
첫 단추를 바르게 끼우는 일.
그게 셔츠를 예쁘게 입는 방법이며,
끝나지 않을 대화를 잇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자리는 인식에서 의미를 가진다."라고 말했고,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은 변하지 않는 기준점을 절대좌표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시간과 거리를 한 장에 접어 시공간이라는 연속체로 설명했다.
이렇듯이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절대 진리로 여겨지던 학설도
새로운 인식 앞에 수정되고 재정립된다.
국제 여론에 따라,
혹은 국내 여론에 따라,
절대 대다수가 맞이하는 인식의 변화에 따라,
그리하여 법이 바뀌는 순간처럼 말이다.
북극성이 누군가를 초대하듯,
두 번째 단추도 첫 단추를 기다린다.
관계는 서두르지 않지만, 반드시 서로의 자리를 기억한다.
이렇듯이 모든 것은
'독립'이 아닌 '공존'.
즉, 관계의 역학(力學/Mechanics) 이론이다.
다시,
칸트는 자리가 인식에 기대어 선다 하였고,
뉴턴 경은 절대의 자를 놓아 만물을 재었고,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을 한 장에 포개었으니,
우리도 그들에 준하는 인생관을 가지려면,
나아가려 하는 곳이 어디인들,
내가 항상 기준이 되는 곳이 어디인지도 확인하는 것이 좋다.
네이버 지도 앱에서는
'집 주소'와 '회사 주소'를
의무적으로 설정하고,
배달의 민족 앱에서는
'집 주소'와 자주 가는 '친구 집 주소'를
편하게 주문하기 위해 설정하듯이
인생이라는 맵에서는
'지향점'과 '기준점'이 필요하다.
둘 사이의 거리를 잃지 않도록
관계의 좌표를 붙잡아 주는 것.
결국 좌표를 정한다는 건,
한 번 정한 시선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극성을 바라 보고 걷는 중이다.
방향을 바꾸는 건 쉽지만,
같은 방향을 오래 보는 건 쉽지 않다.
당신도 그렇겠지.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
인간이 그렇겠지.
그럴 테니까 안 그래야겠지.
길 잃기 무서워.
첫 단추는 나를 바로 세웠다.
하지만 바르게 선다고 해서 길을 아는 건 아니다.
방향을 묻기 전,
먼저 내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두 번째 단추는,
그래서 두 번째 단추는,
내가 잃어버릴 수 있는 방향을 붙잡아 주는 것 같아.
첫 단추가 셔츠를 바로 잡고,
두 번째 단추가 좌표를 붙잡았다면,
이제는 길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이다.
발목에 전해지는 땅의 온기,
가슴 안쪽에서 미묘하게 부풀어 오르는 공기의 밀도.
이것이 설렘이라면,
마침내 발을 떼는 순간에만 찾아오는 설렘이다.
이 관계라는 개념을
기가 막히게 설명한 이들이 있다.
AFC 아약스와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네덜란드에
'토털(하나의 팀, 하나의 플레이)'이라는 철학을 내세운
리뉘스 미헐스,
에른스트 하펠,
요한 크라위프,
빌럼 판하네험이 뭉쳐서
경기장은 한 사람의 플레이가 아니라,
모든 포지션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관계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줘
'당시 FIFA 월드컵 1974™를 보던 약 30억 인구에게' 충격과 경외를 새겨 넣었던
그 철학처럼.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Honoré Marcel),
그리고
아일랜드의 시인이며, 헤겔 철학자였던,
존 오도노휴(John O'Donohue).
그들이 말했던 그 철학처럼 말이야.
"영혼에게 희망이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가 숨 쉬는 것과 같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영혼은 곧 말라죽어버린다."
(I almost think that hope is for the soul what breathing is for the living organism. Where hope is lacking the soul dries up and withers.)
- 가브리엘 -
"친구란 당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깨우기 위한, 그리하여 당신의 삶을 깨우는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A friend is a loved one who awakens your life in order to free the wild possibilities within you.)
- 존 -
그래,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한 흥분은
완전히 모르는 미래가 아니라,
도착지를 알면서도
그 길 위에 무슨 얼굴과 바람과 빛이 있을지 모를 때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세상은 이런 흐름을 두고,
'예측 가능한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한다지.
그 무지(無知)가 기대를 불러들이고,
그 기대가 변수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 변수는
잃고 싶지 않은 것을 더 세게 붙잡게 만든다.
마치 오래 보던 풍경이
어느 날은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오는 순간처럼.
동일한 풍경이,
동일한 시간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처럼.
어느 때면,
나침반 바늘이 '툭'하고 멈추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 순간,
발을 떼는 설렘은
목적지를 향한 기대이자,
그 길에서의 모든 변수를 껴안는 용기이겠지.
모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나침반을 잃어버린 순간처럼.
'그 사람'은 심리학으로 손바닥 위에 올려 굴릴 수 있다.
쉽지.
하지만,
'당신'만큼은,
심리학이든 철학이든,
모든 학문을 때려 넣어도 해석조차 안 된다.
틀릴 수도 있다는 변수,
그 몇 가지가 너무나도 두렵지.
그래서 오히려 강한 관성이 생기지.
어쩌면 인간의 본능.
그러다 문득,
'그래서 나도 해석이 안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스친다.
이건 아마,
평생을 걸고 물어도
내가 끝내 얻지 못할 해답일 거다.
'너'와 '나',
그래서 '우리'라는 이름의 해답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해답은
'너'와 '나'라는 존재가 풀 수 없지만,
'우리'는 해답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왜일까.
수학을 깊게 파면 철학이 나온다더라.
언어를 깊게 파면 심리학이 나온다더라.
법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영학을 깊게 파면
자연계와 인문계와 언어가 동시에 호출된다더라.
학문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만나는 순간,
그 목적이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곧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니
그리하여,
학문을 깊게 파면 감정이 나오더라.
그리고,
감정을 깊게 파면 '내'가 나오더라.
더,
깊게,
더 정교하게,
하지만 더 부드럽게,
그럼 '당신'이 나오더라.
결국 인문사회학, 자연과학, 응용융합의 모든 학문.
즉,
철학으로 시작해서 물리학을 거쳐,
의학을 짚은 뒤 경영학과 정보과학으로 끝나는,
인류가 감각한 23개의 학문 종류는 모든 것이
"사랑"
한 감정에서 출발하여 곧 귀결된다는 진리.
그것이 바로 "나, 너, 그리하여 우리"라는 딱 한 문장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것은 창세기에 등장한
최초의 인간 아담(אָדָם),
그리고 두 번째 인간 하와(חַוָּה).
그들이 머문 에덴동산(낙원/樂園)이 우리 인류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 종교 없음. 무신론자임)
여기에 사랑과, 관계와, 진리와, 자본이 다 담겨있다.
그렇게 세 번째 단추는,
이미 두 번째 단추까지 채웠으니
목적지를 향해 가야만 하는
예측 가능한 불확실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오래 본 별은 더 밝게 느껴진다.
다른 별이 아무리 번쩍여도,
오래 바라본 빛에는 관성이 생긴다.
인간이라는 종(種)은 도무지.
산소를 잃고서는 살 수가 없는 생물군이니까.
그래서,
동시에,
세 번째 단추는
두 번째 단추를 산소처럼 믿고,
북극성의 관성에 이끌리듯
마지막 단추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
그 길에서 마주칠
모든 변수와
예측 가능한 불확실성을
다 껴안기로,
아무 말 없이
결심한다.
가끔은 버튼이 잘못 끼워졌다는 걸 아주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곧게 선 셔츠,
방향 잡힌 좌표,
그리고 예측 가능한 불확실성을 품은 걸음까지.
그런데 문득,
거울을 보니.
넥타이부터 뭔가가 잘못된 이상한 핏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ㄱ-;;
그때는 뛰어야 산다?
아니,
Nope.
이미 세 번째 단추까지 채워봤으니까
재시도를 하면 더 빠르게 단추를 채울 수 있다.
남들이 보면
그냥 넘어갈 정도의 틀어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안다.
첫 단추가 아니라,
조급함이 불러온 기야운 실수라는 걸.
근데 그 실수 수정 안 하면,
하루 종일 답답하다.
어릴 때,
도서관까지 가려면 지나야 했던 다목적홀 앞에서 왠지 모르게 위축되던 때.
바퀴벌레라는 말 한마디에 시험 점수보다 오래 멍들던 때.
별 것 아니었던 감정들,
별 것 아닌 것만 같았던 멍들이,
외려 세상을 감각하는 감각기관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어릴 때 부모님의 말.
"성호야 선생님 말씀 다 기억해."
어릴 때 어머님의 말.
"성호야, 싼 옷을 입더라도 항상 깔끔하게 입는 게 좋아."
날 채용하던 두 번째 회사 대표의 말.
"성호야, 너는 기술자와 기획자 중 뭐가 꿈이니? 포지션 잘 잡아. 기술자는 낭만을 봐."
날 믿던 첫 번째 광고주님이 삼겹살 사주시며 하던 말.
"성호님, 저는 블로그를 보며 왔다는 손님들의 '진짜 대기업인 줄 알았어요'라는 말 한마디가 너무 기뻐요. 진짜 너무 고마워요."
날 상처주려던 이들의 말.
날 보듬어주려던 이들의 말.
너무 재수없다며 들은 말.
너무 감사하다며 들은 말.
삥피티 메모리는 한계가 없기에.
들었던 모든 말의 내용을 기억한다지.
되돌려주지도 않는다지.
되갚아주지도 않는다지.
슬프면 울고,
기쁘면 표현하고,
정중알러지는 태초부터 없었다지.
결국,
내가 발전시킨
세상을 감각하는
감각기관들은 곧
에니타임 오브콜스, 감사합니다.
에브리띵 오브콜스, 부탁합니다.
부탁과 감사였다.
스크린 야구장을 처음 가면,
어떤 이들은 야구공이 빠르다면서,
스윙을 날리기도 이전에 공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안면을 들이댔다면,
그대로 얼굴에 맞았을지도.
아우, 아프겠다.
그러면 자연히,
기계를 만져서,
공의 구속을 낮춰야 한다.
적당한 구속이면,
적당한 타자는 '채-엥!'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건 정면이건 땅이건 어딘가를 향해
안타를 치기 마련이다.
한 번이 우연이면,
두 번은 감이 되고,
세 번은 손 맛이 되며,
네 번째는 필연이 된다.
그렇게 네 번째 단추는
이미 필연 속에서 끼워졌기에,
고작 뒤틀림 현상 하나 발생했다고,
회사에 지각할 일은 없다는 얘기이지.
다시 셔츠를 다 풀고,
하나씩 잠그면 되니까.
짜잔.
삶의 감사를 매번 느끼는 사람은,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외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잠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래,
그토록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 속 명대사가
유독 SNS 등을 통해
여전히 울림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도 다 같은 감정인가 봐.
예쁘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울어도 함께이고 싶고,
단순히 겉핥기가 아니라
진짜 영혼끼리 맞닿는 것을 보고 싶은 그런 감정.
맞아?
맞겠지.
아마 그럴거야.
아님 말고.
그런 마음이 있으면,
사람은 하루를 더 견디고,
한숨을 한 번 덜 쉬고,
조금 더 부드러운 얼굴로 잠들게 될 것만 같아.
그런 마음이 있으면,
길을 잃어도 허둥대지 않고,
낯선 길 위에서도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만 같아.
길을 잃을 땐,
해답은 언제나
혼자서 찾을 수 없으니까
끝없이 물음을 던지는 거야.
그 물음이 쌓이고,
답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모이면
어느새 누군가의 말이, 시선이, 표정이
나를 한 번 더 살아보게 만들더라.
그걸,
철학이라고
있어 보이게 말할 뿐이지.
그럼,
다시 쌓아보자.
철학을 쌓으면 수학,
심리학을 쌓으면 언어학,
자연계와 인문계를 합치면 법학,
'너'를 구성하는 건 나,
'나'를 구성하는 건 감정,
감정을 켜켜이 쌓으면 학문,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역사.
엥,
다 이어지네?
동그라미인가?
윤회인가?
그러네,
어딜가도 한 곳이었네.
좌표였네.
지구는 둥그니까.
사실, 머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