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

도망을 멈추는 연습

by 삥이








오늘도 어김없이,

이런 거지 같은 곳에서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른다. 증거도 없다.


침대는 왜 이렇게 낡았어, 제길.


'뭐, 뭔데,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진짜..'


한 달째다.

눈을 뜨면 매번 다른.. '곳'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어딘가.


한 달째 전 날에 화장실에서 잠시 졸았을 뿐인데..


그날은 서점 근처 작은 바였다.

민트 잔향, 투명 우산, 젖은 영수증.


우리는 서로의 뺨이 스칠 만큼 가까워졌고, 나는 화장실에서 잠깐, 도망치듯 잠들었을 뿐이었다.



잠들면 늘 다음 좌표가 떴다. 대개 내가 도망친 날로.




나는 소위 '성공한 기획자'였다.


숫자와 문장으로 사람 마음을 당겨오는 기술을 배웠고, 밤과 새벽을 섞어 돈을 벌었고, 사람의 온도를 비용 처리하는 법도 꽤 알았다.


그러니까, 낯선 아침이 와도 내 탓이라고 느끼는 버릇은 없었다. 방탕이든 능력이든, 어쨌든 내가 컨트롤한다고 그렇게 믿어왔으니까.




오늘은 달력부터 확인한다.

벽걸이 달력, 손가락으로 종이를 넘기는 구형. 숫자가 선명하다.


2010년.


'하 참 이 씨ㅂ ㅋㅋㅋㅋㅋ 하..'


욕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그래, 레트로 컨셉이네. 누가 내 꿈에 세트장을 지어놨나.


근데 웃음이 입술을 벗어나지 못했다.

탁자 위의 폴더폰, 'SKT 011' 번호대, 액정의 스크래치.

서랍 속에 눌려 있던 종이영수증. '2010. 03. 18.'



이건 컨셉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나는 세면대에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거울을 봤다.


어려 보이는 얼굴. 아니, 실제로 어려졌다.

그해의 내가 맞았고, 그해의 팔 근육이 맞았다.


이상하게도, 공기가 얇았다.

기억보다 더 가벼운 산소.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현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기기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아이폰 날씨 앱도 없지.


문을 열자, 계단참에 낯익은 냄새가 있었다.


군고구마, 담배, 싸구려 방향제.

그 모든 냄새가 동시에 났다.



2010년의 공기였다.













제1장. 식탁의 젓가락 '딱'





'어디부터 가야 하지?'


몸이 먼저 길을 알고 있는 듯이 뇌가 건네는 물음은 무시한 채 길을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가 큰길을 건너, 노란 간판이 달린 분식집으로. 내가 자주 가던 곳.



아니, 오늘 가야 하는 곳.



문을 열자, 종이 구슬처럼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주인장의 목소리가 시간을 확정한다.

벽엔 '토마토케첩 추가 200원'같은 문구가 붙어 있다.

테이블 한가운데, 내가 앉던 자리엔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왔냐"


그는 내 앞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백지훈. 그때의 내 친구. 그래 너 이 녀석.

기억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갔던 사람.


기억이 어지럽게 밀려왔다.










이 날.

내가 유난히 기세가 등등했고, 지훈은 취업을 망쳐서 우울했고, 나는 '현실을 직시해' 같은 말을 던졌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뒤로 나를 오래 보지 않았던 날.


"야, 너 어제 그 기획안 말이야. 진짜 미쳤더라.."


지훈이 내 눈을 봤다.

나는 젓가락을 집었다 놓았다.

그 작은 소리 하나가 방 전체를 건드렸다.


그땐 자랑 반, 충고 반을 얹었다. '프로니까'라는 변명까지. 그랬다, 그때는.



그때는 내가 그랬다.










오늘의 나는 입술을 닫았다.

그리고 물을 먼저 마셨다.

목구멍이 식는 동안, 머리가 약간 선명해진다.



"지훈아."


그는 "응" 하고 고개를 든다.

나는 대본을 잊은 배우처럼 잠깐 멈췄다가, 아주 짧게 말했다.


"미안.."


그 단어는 설명을 싫어한다.

'뭐가'라는 질문이 뒤따를 걸 알면서도, 나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지훈의 어깨에 올라탄 힘이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주인장이 김밥을 놓고 갔다. 김밥이 그저 김밥처럼 보였다.


"뭐가?"


질문이 왔다.

오늘의 나는 나중에 대답하기로 한다.

지금은 먼저 듣는다.


지훈은 스스로 "아냐, 됐다"를 꺼내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한 박자 늦게 터뜨렸다.

밤샘. 면접실의 세제 냄새. 형광등의 모기 소리.

서른여덟 장의 탈락 메일. 이자 알림 여덟 건.

부모님 부엌 환풍기 옆 한숨.

여자친구 문자의 말줄임표.

대출에 박힌 숫자 -27,846,000원.

그리고, 내 앞에서만 못 운다는 자존심.


여기서 젓가락을 '딱'하고 내려놨다.


나는 그 얘기가 '내가 고쳐줄 문제'가 아니라 '그가 비워야 사는 것'이라는 걸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이해했다.


"실력은 네가 더 좋다."


내 입에서 그 문장이 떨어졌다.

진심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밥을 다 먹고, 우리는 계산대 앞에서 멈췄다.


"야."


지훈이 말했다.


"오늘 너 왜 이러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뭐가?"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불고 있다. 분식집의 간장 냄새가 희석되고, 겨울 끝의 냄새가 코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오랜만에 그 바람이 머무는 소리를 들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은 보통 스치는데, 오늘은 잠깐 서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폴더폰을 열자, '어머니' 세 글자.


2010년의 어머니.

화면 아래 '통화 00:00:15'라는 과거의 숫자가 떠오른다.


그날 나는 '나중에 전화할게'라고 말하고 받지 않았었지. 바빴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조금 기다려볼 것이다.


"어, 엄마"


단 두 단어를 말하는데 대답이 이상하게 길었다.


"밥은 먹고 다니니?"


"응 엄마. 엄마는? 밥 뭐 먹었는데? 먹고 싶은 것 없어?"


"엄마는, 늘 잘 먹어. 감기 조심해."


"응 알겠어. 나 돈 열심히 벌고 있을게, 아빠랑 소고기 먹으러 가자."


"응 아들, 사랑해"


끊고 나니, 이번엔 내가 울고 있었다. 그때는 어머님이 말없이 홀로 우셨을까. 오늘 내가 우는 이유는 나중으로 미루련다.



이해는 늘 나중에 오니까.









밤이 왔다.


나는 다시 그 방으로 돌아왔다.

달력의 숫자가, 창문 밖 네온사인이, 폴더폰의 바람 빠진 벨소리가 2010년을 끝까지 밀어주고 있었다.


'오늘은 뭐가 과제였지?'


서랍을 열었다.

구겨진 전표들 사이에서 작은 메모지가 나왔다.


내 글씨.

< 지훈. 엄마. 젓가락 '딱' >

나는 피식 웃었다. 하루치의 미션 클리어.


불을 끄려다, 창밖을 한 번 더 봤다.

골목 끝에서 누군가 우산을 접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산 접는 동작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다.


머릿속 어딘가가 '찡'하고 당겨지는 기분이 든다.


'아니야.. 오늘은 아니야.'


이상하게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랑은 늘 여기 있었지만, 오늘의 순서는 아니었다.



자리에 누웠다.


잠들기 직전, 스스로에게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와. 일단 살자.'


눈꺼풀이 내려간다.

검은 화면 위로 숫자들이 흐른다.

2007, 2010, 2018.. 그리고 비어있는 칸 하나.


그 칸이 내일인지, 어제인지, 아주 먼 날인지 모른다.


알 필요는 없다. 내가 할 일은 하나. 돌아올 자리를 하나씩 닦아두는 것.


사과든, 경청이든, 반 칸 비켜 앉기든.

머무를 수 있게, 머무르게.


그리고 잠들었다.















제2장. 엘리베이터의 '띵'





눈을 뜨자, 화면이 먼저 날 봤다.


잠금화면.

2018. 09. 14. FRI. 07:12.


바탕엔 회사 빌딩 사진.

유리 커튼월이 하늘을 잘라먹는 모양.

신분증 목걸이가 침대 옆에 누워 있었다.

금속 고리가 차갑다. 이게 오늘이다.


샤워를 하고, 넥타이를 맸다.

머리를 매만지고, 손목에 값비싼 향수를 뿌린다.


문손잡이를 돌리며 나는 내 속도로 하루를 점검했다.


'오늘은.. 누구 차례였지.'


로비는 바람이 없는데도 서늘했다.

카드를 찍자 '삑',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등번호처럼 층수가 우리 등을 붙잡았다.


. 3층.

. 5층.

. 7층.


14층 버튼에 불이 들어온 뒤에야 나는 옆 사람의 손등을 봤다.


파란 바인더를 끌어안은 손.

손등에 하얀 자국. 오래 누른 자국.

민서였다. 그 해, 우리 팀의 막내.


그녀는 오늘 HR 동행 면담이 있었다.

'내가 만든 리뷰 체계 덕분에' 라는 말을,

나는 예전에 자랑처럼 했었다.


리뷰는 공정했고, 데이터는 투명했고, 모든 피드백은 CC 전체로 공유된다.


그게 '우린 프로니까'라는 의식.

그날 이후, 누군가의 계단은 무너졌고, 누군가의 밤은 더 길어졌다.


민서의 휴대폰이 떨렸다.

테두리 깨진 액정이 '엄마'를 보여주고 사라졌다.


그녀는 통화 버튼을 보다가, 화면을 뒤집었다.

나는 내 손목시계를 보다가, 버튼을 눌렀다. 닫힘.

문이 열리려다 다시 닫혔다. 아주 짧은 휴식.


"전화, 받아. 민서야."


내 목소리는 명령 아닌 부탁처럼 나갔다.

그렇게 나가버렸다.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니, 내 넥타이 매듭을 바라보았다.


"잠깐이면 돼. 면담은 내가 미룰게."


그녀는 멈칫하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엘리베이터 구석에 붙어 작은 공간을 만들고, 귀에 휴대폰을 댔다.


"엄마.. 나 회사 지금.. 아냐.. 괜찮아. 밥 먹었어. 아빠는? 약은 드셨어? ... 응."


띵. 14층.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우리 얼굴을 만졌다.









오픈된 사무실은 늘 같았다.

복도 카펫의 무릎 높이 먼지, 프린터 '삐익', 커피머신의 물 끓는 소리.


내 자리 모니터엔 미리 쓰인 게 있었다.


Re: [검토] 3분기 리포트 수정
받는 사람: 팀 전체, 본부 전체
CC: HR-Review, PM-Lab

민서 담당 파트에서 가정 A2('신규 유입의 30%가 리퍼럴') 근거 치명적 누락 확인. 아래와 같이 즉시 수정 바랍니다.

(세부내용 첨부)


받는 사람에서 '팀 전체, 본부 전체'를 지웠다.

참조의 HR-Review, PM-Lab도 뺐다.
민서만 남았다.


치명적을 지웠다. 그랬더니 문장이 사람 말을 닮았다.


민서, 오전에 같이 보자.
네가 어제 붙여놓은 가정은 조금 불완전했어.
내가 놓친 히스토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회의는 내가 미룰게. 20분만, 둘이 같이 보자.


[보내기].

[메일이 성공적으로 보내졌습니다.]


문자도 보냈다.

"민서와 사전 1:1 후 면담 들어갈게요. 10분만 지연 부탁드립니다. 기록은 제가 남기겠습니다."


캘린더를 열었다.

[캘린더] 'HR 동행 면담' 10:30 → 11:00로 변경(사유: 가정 검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은 반 칸만 비켜도 숨을 쉰다는 걸, 2010년의 젓가락이 가르쳐줬다.









회의실 유리문에 우리의 모습이 겹쳤다.

민서가 바인더를 펴며 말했다.


"팀장님.. 저 치명적 실수한 거 맞아요. 어제 PM님이 CC로.."


"알아. 그래서 뺐어."


"네?"


"전체 말고 우리 둘. 오늘은 두 명이서만 고치자. 같이."


민서는 나를 보다가, 바인더를 내려놓았다.

페이지마다 형광펜이 길을 내고 있었다.

그 길은 그녀가 어젯밤을 새우고도 모자랐다는 뜻이었겠지.

걱정, 불안, 슬픔, 후회 속에서 졸린 줄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겠지.


"민서야, 네 계산은 확실히 틀려."


그녀는 고개를 떨군다.


"대신, 네 맥락은 맞았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든다.


"여기선 가정보다 사례가 먼저야. 사용자 한 명의 목소리를, 숫자보다 먼저 붙여봐."


우리는 17분 동안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말하고, 내가 듣고, 내가 말하고, 그녀가 고쳤다.


프린터가 한 번 더 '삐익-!' 울렸다.

종이가 나오는 소리, 누군가가 숨을 제대로 쉬는 소리.

둘은 생각보다 비슷하게 느껴졌다.


회의실을 나와 HR 담당자 앞에서 멈췄다.

면담 시계가 10분 밀려 있었다.

담당자가 "팀장님, 일정이.."라고 말하려다, 내 손목시계를 봤다.


"오늘은 우리 팀 내부 피드백으로 갈게요. 기록은 제가 올릴게요."


담당자는 조금 놀랐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오늘.. 왜 그러세요."


나는 고갤 기울였다.


"뭐가?"


문이 열렸고, 띵.

그 소리가, 오늘은 아주 조용했고, 또 맑았다.









점심 무렵, 사무실 안쪽에서 카톡 소리가 났다.


민서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팀장님, 아빠가 병원에 계셨대요. 오늘 결과 나왔는데.. 양성 병변이라서 수술이나 치료로 충분하대요."


나는 속으로만 안도의 고개를 끄덕였다.

양성.. 음성.. 어려운 단어들이 뒤집어쓴 흰 가면들 사이에서 오늘 민서와 내가 고른 건 안도의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민서야."


그 말 뒤에, 나는 한 줄을 더 붙였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아니, 뛰어가보는 건 어때? ㅋㅋ"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어린 사람이 아니라, 오늘 하루만큼은 같은 쪽에서 숨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 드디어, 내 팀원. 내 사람 같아 보였다.










퇴근길.


로비 바닥의 대리석이 노을을 깔고 있었다.


유리문을 나서며 나는 한 번 더 멈췄다.

복도 가장 끝, 초록 비상구 표지가 깜빡거렸다.

그 작은 불빛이 오늘의 북극성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살리는 표식은 대개 소박하다.


문손잡이를 잡으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설명은 나중에 와. 오늘은 비켜서자."


집에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구겨진 영수증 사이, 메모지 하나.


< 민서. CC. 엘리베이터 '띵' >


나는 볼펜으로 작은 별표 하나를 옆에 찍었다.


그리고 불을 끄려다 창밖을 봤다.

비 예보 없던 하늘에, 작은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접는 사람이 골목에 있었다.

오늘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알았다. 그건 서막이라는 것을.

어떤 슬픔은, 이렇게 조용한 예고로 온다는 것을.


잠을 청했다.

눈꺼풀이 내려오며, 귀 안쪽에서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따뜻하고, 맑고, 예쁜 소리.















제3장. 체육창고의 철문 '끼익'





화면은 없었다. 대신 스피커가 먼저 날 봤다.


'지지직..'


잡음이 흐르고, 교내 방송이 돌아갔다.

벽시계는 2007. 05. 28. MON. 17:40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

바닥의 테이프 자국, 축제 포스터가 반쯤 뜯겨 흔들렸다.


손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손바닥에 분필 가루 냄새가 났다.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또 뇌가 건네는 물음을 무시한 채 몸이 먼저 대답했다.



그날.



체육관 옆 철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자 금속이 차가웠다.

문은 오래된 기억처럼 떨며 열렸다.


끼익.


안은 반어둑했고, 플라스틱 의자들이 뒤집혀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민트 껌 포장이 한 장 접힌 채 놓여 있었다.


그건 그 애가 늘 씹던 껌이었다.

이름은 수민. 같은 반, 문학부 동아리.


그해, 나를 오래 좋아했던 사람.

그해, 내가 아주 가볍게 밟아버린 사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따가 여기서 친구들이 몰려올 거라는 걸.

누군가 "야, 얘 너 좋아한대?"라고 떠밀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애가 얼굴을 가린 채 뛰쳐나갈 거라는 걸.

비가 오던 날. 우산은 하나뿐이었고, 나는 그 검정색 장우산을 가지고 갔다.


오늘은, 다르게.


"성호야."

뒤에서 부르는 소리. 수민이었다.

흰 교복 블라우스가 비에 젖어 소매가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한 장의 MP3를 들고 있었다. 유성펜으로 쓴 글씨


- for S.H. -


"잠깐.. 얘기할 수 있어?"


그 목소리에는 결심의 떨림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나는, 먼저 문을 닫았다.


끼익. 또 한 번, 철문이 시간을 밀어 닫는 소리.


"그때, 아니, 오늘 네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아."


내가 말을 꺼내자, 수민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근데, 나 먼저 말할게."


입안이 말랐다. 물도, 대본도 없었다.


"그날 내가 웃었던 거 알지."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웃음에, 네 하루가 찢어졌다는 것도 이제 알았어."


잠깐의 정적.

멀리서 체육관 안 농구공이 바닥을 튀겼다.


쿵. 쿵.


그 소리 사이로 비 냄새가 스며들었다.


"아니, 이거.. 너 듣고 힘내라고.."


수민이 MP3을 내밀다가 멈췄다.

그리고 민트 껌을 하나 꺼내 씹었다.

껌의 첫 씹힘에 '딱-'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고른다.


"수민아"


"미안."


단어 하나로는 모자란 줄 알면서도, 오늘은 먼저 그 말을 꺼냈다. 공기가 눅눅해진 기분이다.


밖에서 발걸음들이 가까워졌다.

문 앞에서 친구들 목소리가 겹쳤다.


"야야야, 여기라며?"

"야~ 성호~"


웃음 직전의 기대가 소음처럼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오늘은 닫아둔다.


끼익.


철문이 한 번 더, 사람을 막았다.


"잠깐만"


문 사이로 아이들의 불만이 흘렀다가 멀어졌다.

아이들의 발소리가 다른 곳을 향하는 듯 싶은 느낌.


나는 수민 쪽으로 몸을 반 칸 비켜 세웠다.

공간이 생겼고, 그녀가 숨을 쉬었다.


"오늘은 같이 나가자."


나는 준비된 검정색 장우산을 빼 들었다.

살짝 흔드니 천 끝에서 물이 '툭' 떨어졌다.

2007년 여름의 물방울.


그때 내가 놓친 머묾의 시간.


우리는 문을 열었다.


끼익.


바깥은 흐렸다. 체육관 처마 끝에서 물줄기가 실처럼 떨어졌다.


나는 우산을 펼쳐 수민의 어깨로 기울였다. 우산 아래로 들어오는 그녀의 숨, 아주 얕고 빠른 리듬. 그 리듬에 맞춰 내 숨도 느려졌다.


"너, 내 미니홈피 배경음악 알지?"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응"


"그거, 오늘 바꾸려고 했거든"


"뭘로?"


"윤하 - 비밀번호486"


우리 둘 다 빵 터졌다. 어이가 없는 귀여움.


체육관 뒤편, 운동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웅덩이 위로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동그랗게 퍼졌다.


누군가의 짝사랑은 이렇게 퍼졌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만은, 사라지기 전에 붙잡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손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함께 서는 방식으로.



"성호야"


"응"


"오늘 너.. 왜 그래?"


나는 웃었다.


"뭐가?"


그 대답은 2018년의 엘리베이터에도, 2010년의 분식집에도, 그리고 지금의 우리 우산 아래에도 같은 온도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창고로 다시 돌아와 MP3을 책상 위에 조심히 놓았다.

마커로 한 줄을 덧붙였다.


"돌아올 자리 하나 남겨둔다."


수민이 '얘 뭐라지?'라고 묻는 듯 눈빛을 보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설명은, 늘 나중에 오는 법이라서.


해가 기울 때까지 우리는 우산 아래에 있었다.

큰 말은 없었지만, 머무는 말들이 왕복했다.


비는 여전히 가늘었고, 우산 천 위에서 툭, 툭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그 소리가, 오늘의 북극성처럼 들렸다.

돌아갈 좌표를 알려주는, 아주 조용한 소리.


돌아오는 길, 체육창고 철문이 마지막으로 울었다.


끼익.


문은 닫혔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끼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구겨진 전표 사이에 메모지를 꺼냈다.


< 수민. 창고. 문 '끼익' >


볼펜으로 별표를 하나 찍었다.


불을 끄려다 창밖을 봤다.

골목 끝, 누군가 우산을 접고 있었다.


오늘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이건 서막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걸.

슬픔을 미리 알리던 그 우산이, 이제는 머무를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몸을 눕혔다.

눈꺼풀이 내려오며, 귀 안쪽에서 철문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끼익.

그리고 아주 작게, 툭.


'설명은 나중에 와. 오늘은.. 같이 맞자.'


나는 잠들었다.
















제4장. 우산의 낙하 '툭'





알람보다 슬랙이 먼저 울렸다.


[Brand Review] 회의록 업데이트 - 19:01


캘린더는 방금 끝난 회의를 연회색으로 지웠다. 다음 일정은 비어 있었다. 드물게, 오늘은.


잠금화면: 2025-07-15 TUE 19:03.


창밖 간판 불빛이 젖은 도로 위로 길게 미끄러졌다.

코트를 집어 들고, 문손잡이를 한 번 더 꽉 쥐었다.


오늘은 바로 그날이었다.

내 예감이 맞다면, 그날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날.









지하철 출구를 올라오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경로를 최적화했다.


신호 주기, 대각선 건너기, 대기 시간 최소화.

기획자는 길도 PPT처럼 정리한다.

발끝이 횡단보도 선에 닿자, 나는 일부러 한 박자 늦췄다.



오늘의 KPI는 효율이 아니라 머묾이다.



사거리 모서리, 오래된 문우서점(文友書店) 간판 아래에 그녀가 서 있었다.


검은 우산, 회색 코트, 어깨에 매단 가방끈을 한 번 쥐었다 놓는 버릇.


그 버릇을 나는 기억했다. 기억만 하고, 말은 못 했던 지난 시간.



이름은 .

나는 마음속에 자동으로 뜨는 세 칸의 프레임 [배경, 목적, 메시지] 를 지웠다.


오늘은 프레임 없이, 사람부터.


중요한 건, 오늘은 순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



나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한 걸음 반 칸 비켜섰다.

그만큼의 공간이 생기자, 내 심장과 비의 박자가 겨우 맞았다.



"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야."

단어는 얇았지만, 오래 준비한 소리였다.


그녀가 우산을 조금 기울였다.

내 어깨 위로 툭-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그 소리를 '시작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녀와 카페에 들어서자 습관처럼 메뉴판을 스캔했다.

체류 시간 예측, 동선, 열량, 가격.. 머릿속에 작은 테이블이 그려졌다.


나는 그 테이블을 접고 물었다.

"오늘은 따뜻한 거.. 민트, 괜찮을까?"


그녀가 미세하게 웃었다. "응."


창가 자리. 벽시계 20:18.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대화의 목차를 잡으려다가 멈췄다.


기획자는 목차로 안심한다.

하지만 사랑은 목차 없이도 완성된다. 오늘만은 그렇게 믿어보기로.




"그때."

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말 안 했어?"


나는 준비해 둔 변명을 지웠다.


"겁났어. 그래서 잠들었어."


"뭐가?"


"틀릴까 봐. 너의 방향을 내가 바꿔버릴까 봐."


"그래서 그냥 지나갔구나."


"응"


"그게 더 아팠어."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웃음 안에 피로가 있었고, 피로 안에 머묾이 있었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잡지 않았다. 자리를 만들었다.

기획자가 늘 찾는 건 자리였지만, 오늘의 자리는 사람 사이 공기였다.



"요즘은 잘 지내?"


"이젠 '잘 지내려고' 지내."


"그게 훨씬 좋다."


"너는?"


"나도 '잘 지내려고' 지내."


그 말이 내게서 그녀에게, 다시 내게 왕복했다.

왕복하는 말은 관계를 만든다. 편도는 독백이고, 왕복은 회복이다.


밖의 비가 굵어졌다.

카페 지붕 위 어딘가에서 우산들이 한꺼번에 접혔다.


툭. 툭. 툭.


오늘의 북극성은 소리였다.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아주 작은 신호.



"그날 네가 서 있던 자리를.. 이제야 알겠어."


"어떤 자리?"


"돌아올 수 있는 자리."


그녀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나는 웃지 않고, 대신 속도를 맞췄다.

말의 속도, 숨의 속도, 눈의 속도.



우리는 남은 민트를 다 마시고 처마 아래로 섰다.

나는 가방에서 투명 우산을 꺼냈다.

펼치며 설 쪽으로 반 칸 기울였다.

천 끝에서 물이 툭- 떨어졌다.

기획자는 보통 증거로 설득하지만, 사랑은 이렇게 소리 하나로 충분할 때가 있는 것 같다.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뀐 것을 보고, 우리는 건넜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는 마음속 캘린더를 열고, 저녁 9시 칸에 새 이벤트를 만들었다.


머묾(stay) / RULE: 매주 수 21:00 / 장소: 문우서점 앞.


전송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옆 사람의 걸음에 초점을 맞출 뿐.



골목 입구에서 그녀가 멈췄다.


"여기서 갈래."


"그래."


"오늘.. 고마워."


"엥, 내가 더 고마워!"


그녀가 우산을 접었다. 툭.

그 소리는 끝이 아니라 다음을 남겼다.









집에 왔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가 닫았다.

문서 제목을 치다가 지웠다.


[회고] 2025-07-15 - 설.


보통은 회고로 하루를 닫는다.

하지만 오늘은 메모로 닫기로 했다.


서랍에서 메모지를 꺼내 적었다.


< 설. 민트. 우산 '툭' / 속도 맞추기 >


별표를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기왕이면 또 한 번 더.



불을 끄려다, 창밖을 봤다.

골목 끝에 누군가 서 있다가, 아주 천천히 사라졌다.


그 실루엣이 오늘은 낯설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해도 괜찮았다. 돌아올 자리를 서로가 알고 있으니까.


나는 누웠다.


눈꺼풀이 내려오며, 귓속에서 툭- 소리가 한 번 더.

멀리서 딱-, 띵-, 끼익- 이 차례로 따라왔다.


'설명은 나중에 와. 오늘은 머물자.'


그리고 잠들었다.













제5장. 별표의 지도 '★'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정적이 시간을 열었다.


잠금화면을 켰다. 이상했다.

연도 칸이 비어 있었다. - - - - / - - / - - 07:12.


'풉'


웃음이 났다. 드디어 오늘만 남았다.


서랍을 열었다. 구겨진 영수증들 사이로 네 장의 메모가 누워 있었다.


< 지훈. 엄마. 젓가락 '딱' > ★

< 민서. CC. 엘리베이터 '띵' > ★

< 수민. 창고. 문 '끼익' > ★

< 설. 민트. 우산 '툭' / 속도 맞추기 > ★★★


메모를 책상 위에 사분면처럼 펼쳤다.


왼쪽 위에 딱,

오른쪽 위에 띵,

왼쪽 아래에 끼익,

오른쪽 아래에 툭.


한가운데엔 여백이 남았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옆에 썼다. 머묾.





종이를 뒤집는데, 볼펜자국이 희미하게 비쳤다.


짧은 문장 셋.



졸음 = 도망.

루프 = 재배치(상처 준 날로).

해제 = 머묾(자리를 만들면 끝).

어젯밤은 연습, 오늘은 저장.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나는 도망치던 사람이었고, 시간은 나를 도망친 자리로 되돌렸던 것이다.


돌아가서 머물자, 끝나더라.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갑지 않았다.

오늘은 돌아가는 날이었다. 누군가의 자리로, 그리고 우리의 자리로.







문을 나서 일부러 반 박자 느리게 걸었다.


김밥집 앞에서 젓가락이 부딪혔다. 딱.

사무동 로비를 지날 때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띵.

학교 담장 옆 철문이 바람에 흔들렸다. 끼익.

하늘 어딘가에선 우산 하나가 접혔다. 툭.


네 소리가 발밑에서 한 줄이 됐다.

지도는 바깥에 있지만, 좌표는 내 안에 있었다.







서점 앞.

그녀가 서 있었다.


검은 우산, 회색 코트, 예전보다 조금 느린 걸음.


그 느림이 오늘의 합의 같았다.



"설."


"응."


"오늘, 시간 괜찮아?"


"응. 오늘은.. 괜찮아."



우리는 카페 창가에 앉았다.

민트를 시키고, 뜨거운 물을 하나 더.

어젯밤의 질문이 오늘도 돌아왔다.

같은 문장이지만 기능이 달랐다.


어제는 검증, 오늘은 확인.

어제는 초안, 오늘은 약속.



"그때."

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말 안 했어?"


나는 준비해 둔 변명을 지웠다.


"겁났어."


"뭐가?"


"틀릴까 봐. 너의 방향을 내가 바꿔버릴까 봐."


"그래서 그냥 지나갔구나."


"응"


"그게 더 아팠어."


그녀의 웃음이 아주 얇게 흔들렸다. 피로 대신 숨이 들어왔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한 칸의 공간을 만들었다.

잡지 않았다. 옆에 섰다.

그 사이 공기가 데워졌다.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예전 같았으면 목차부터 뽑았을 거다. 개념, 사례, 결론.


오늘은 한 줄로 끝내련다.


"돌아올 수 있는 자리. 같은 속도로 오래."


그녀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카페를 나섰고,

그녀는 말 대신 우산을 내 쪽으로 반 칸 기울였다.


천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툭.

그 소리가 오늘의 북극성처럼 들렸다. 어디서든 길을 맞추게 하는 아주 작은 신호.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함께 건넜다.



나는 마음속 캘린더를 열고, 저녁 9시 칸에 새 이벤트를 만들었다.


머묾(stay) / RULE: 매주 수 21:00 / 장소: 문우서점 앞.


이번에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설명은.. 나중에 와."


"알아."


"오늘은 우리, 같이 머물자."


그녀가 대답 대신 우산을 조금 더 내 쪽으로 기울였다.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일들을 정리했다.


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국밥에 소주 한 잔?"을 제안했고,

민서에겐 짧은 메일을 보냈다.


오래된 MP3를 꺼냈다. for S.H.

뒤에 작은 스티커를 하나 더 붙였다. for S.M.

보내지 않아도 됐다. 스티커를 붙이는 순간, 내 안의 철문이 조용히 닫혔다. 끼익.


이번엔 아무것도 끼이지 않았다.



서랍에서 메모 4장을 다시 꺼내 한 장으로 겹쳤다.

그리고는 뒤집어 새로 썼다.



< 사람. 자리. 속도. 머묾. >

그리고 맨 아래에 아주 작게.. 사랑.



나는 누웠다. 눈꺼풀이 내려왔다.

귀 안쪽에서 네 소리가 차례로 울렸다.


딱- 젓가락.

띵- 엘리베이터.

끼익- 철문.

툭- 우산.


소리들은 서로 겹쳐 한 줄이 됐다.

그 줄은 좌표였다. 좌표의 이름을 나는 조용히 불렀다.


"설"


눈을 떴다.

잠금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2025-08-14 THU 12:43.


연도는 돌아왔고, 일정은 파랗게 빛났다.

머묾(stay) - 수 21:00 - 문우서점 앞





오늘은 메시지 한 줄.


"설, 오늘 다시 가볍게 한 잔 할래?"


그 밤, 서로의 뺨이 스치다 끊긴 장면을 이어붙이려고.


그날처럼 잠들지 않으려고,

오늘은 도망치지 않으려고.





나는 웃었다.

끝이 아니다. 다만 도망이 끝났을 뿐.

머물 자리가 생겼고, 돌아갈 좌표가 정해졌다.

그 좌표를 나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사랑.













반복은 벌이 아니었다.

머무는 법을 복습하라는 은혜.

어쩌면 미뤄둔 말을 제때 건네볼 기회.


작 중 주인공에게 북극성의 이름은 '설'이었다. 사람이자 방향.


그래서 그는 2010년, 2018년, 2007년, 2025년 8월 13일, 연도 칸이 비어 있던 어느 날(사실은 2025년 8월 13일의 반복)의 황당한 사건을 연달아 통과한다.


루프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규칙인 셈.







다시 보자.


졸음 = 도망.

루프 = 재배치(상처 준 날로).

해제 = 머묾(자리를 만들면 끝).


작중 '성호'는 도망친 자리마다 돌아가 한 가지씩 바꿨다.

말의 순서, 시선의 높이, 속도의 기준.

화려한 사과문 대신 머무는 시간을 내어놓았을 뿐이다.








또, 다시 보자.


딱.

젓가락은 자아 브레이크다.

지훈 앞에서 그는 훈계와 자랑을 접고, 사과와 경청으로 첫 단추를 채운다. 첫 단추는 셔츠를 예쁘게 입는 방법이라지. 문제를 고쳐주는 척이 아니라, 자리를 내주고 말의 속도를 늦췄다. 사람은 반 칸만 비켜줘도 숨을 쉰다는 걸 그제야 배운다.


띵.

엘리베이터는 동행의 신호였다.

민서에겐 메일로 공개 망신을 주던 습관을 지운다. 대신, 둘만의 화면을 켠다. 비공개 동행은 책임을 나누되 얼굴을 지켜줄 수가 있다. 데이터보다 맥락을 먼저 읽어야 한다. 승진 밖에 모르던 그가 조직의 언어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끼익.

체육창고 철문은 보호를 위한 경계였다.

수민을 둘러싼 잔인한 장난을 문으로 막아 세운다. 방치와 중립을 틀어쥐던 손에서 경계라는 선택지가 태어난다. 문을 닫았는데, 아무도 끼이지 않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툭.

우산은 속도 맞추기의 신호였다.

설과는 반 칸 기울여 선다. 잡지도 않았고, 그저 자리를 만들었다. 효율과 최적화로만 길을 재던 사람이, 마침내 같은 속도라는 좌표를 기억한다.


사랑은, 사랑은 큰 고백보다 오래 같은 박자로 걷는 일이라는 걸, 비의 간격이 가르쳐줬다.






'반 칸'은 뭔가.


정서적 존중의 물리적 거리다. 소유가 아니라 머묾의 기술이다.


"내가 너를 안다"가 절대 아니다. 머묾이 오타가 나면 '머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오타 계속 난다. 필자도 이 소설의 해석을 '머룸' 상태에서 쓰는 것이다.


그래도 아는 척이 아닌, '머묾의 자리'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쯤은 안다.



성공한 기획자였던 그는 직업의 언어까지 바꾼다.

KPI, CC, 타임라인으로 사람을 재단하던 기획자는, 이제 자리, 속도, 머묾으로 관계를 설계한다. 회고 문서 대신 작은 메모, 선전포고 대신 캘린더 저장.


고백보다 견고한 약속.

사랑을 이벤트가 아닌 습관으로 만드는 사소하지만 단단한 의식.







이 이야기의 뒤집힘은 여기 있다.


효율의 끝에서 찾은 것은 성과가 아니라 여유였고,

반복의 끝에서 얻은 것은 처벌이 아니라 해제였다.


도망을 멈추자 시간은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 여백에 '설'의 이름이 놓였다.






필자는 물었다.

이제 질문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하루엔 어느 소리가 먼저 들리시는지요.

무심코 '딱'하고 내려놓아야 할 자존심은 무엇이고,

오늘 '띵'하고 함께 타야 할 엘리베이터는 누구와의 것이며,

누군가를 위해 '끼익'하고 세상을 잠깐 막아줄 용기는 있는지,

그리고 비가 오면 '툭'하고 우산을 반 칸 기울여 설 수 있는지.



연도는 다시 맞춰졌다.

중요한 건 날짜가 아니라 좌표.

돌아올 수 있는 자리, 같은 속도로 오래.


내가 어디에 놓였는지 가끔은 무섭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너무나도 명확한.


따뜻한 곳.

울어도 되는 곳.

기대어 잠자도 괜찮은 곳.



북극성.

그 이름을 소설 속 주인공은 단지 '설'이라 불렀을 뿐이다.






세계는 넓고,

좌표는 하나.


매일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사람, 같은 말, 같은 자리.


반 칸 비켜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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