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날씨를 난 믿지 않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한다
오늘의 날씨는
그리 맑지 않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
포근합니다.
오늘의 날씨를
난 믿지 않지만
참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합니다.
용기를 내 거릴 나와 보니
괜히 나만 우울했나 봐.
젖은 우산 같던
마음도 마를 것 같아.
기분 좋은 남들처럼
아름답기만 한 하루가
이제 시작될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구름이 몰려
또 한바탕 소나기를 뿌리고,
우산 따위
있을 리 없지
오늘 분명히 비는 없다 했는데,
그랬는데.
가수 10cm의
'10월의 날씨'라는 곡 중 1절 가사 내용이다.
보통 우리들은 날씨 예보를 믿지 않는다.
비가 안 온다고 해서,
외출을 했는데 막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경우도 많고,
비가 온다고 해서,
오늘은 차를 끌지 않고,
우산도 단단히 챙겼는데,
막상 해는 쨍쨍했던 그날의 하루.
이렇듯 모든 걱정은
보통 기우로 끝나지만
1%의 확률 때문에 그게 아니어버리면,
사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 중 하나였다면,
무참히 쏟아져내리는 비에
무방비로 뚜들겨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날씨 예보의 '비 소식'에
우산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흐림 소식'에도 우산을 준비하고,
아예 여름이면 우산을 가방이나 차 시트 왼칸에 상시 구비를 해두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 기제'였던 것이다.
<10cm - 10월의 날씨>
제아무리 잘났고,
제아무리 똑똑하고,
제아무리 현명해도
1%의 불안은
99%의 초석을
짓뭉개버리기도 한다.
사건 발생 확률이 극히 낮은 경우,
통계학에서는 그것을 희소 사건(Rare Event)이라고 표현한다.
예컨대,
로지스틱 회귀라는 통계 모델은
0과 1의 예측을 반복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큰 문제.
'1'이 너무 드물게 발생할 때마다
모델은 그 드문 1을 '무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사했던 날들.
괜찮은 척했던 순간들.
표정도 감동도 모든 게 안정적으로 보였던 시간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1이 보이면, 필연적으로
나는 무너진다.
당신도,
거기서 서계신 당신도,
그리고 아마 저기서 앉아있는 당신도.
그래서 우리는
그 1%를 무시할 수도 없고,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도 없다.
즉,
1%의 미학.
그리하여 돌발 상수(Sudden constant).
그 1%의 불안이
2%, 10%, 40%,
그리고 더는 손 쓸 수 없는 70% 이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간은 '발버둥'이라는 선택지로 향하기도 한다.
내게 그런 관리법이 있다면, 비난이었다.
"너는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어
세상에서 제일 못났고,
또 세상에서 제일 뚱뚱하고,
또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그리고 또 세상에서 제일 둔감해."
내게 당근을 주지 않는다.
타인이 건네지 못하는 채찍을,
나는 언제부턴가 내 손에 쥐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발버둥 칠 트리거를 만들지 않으면,
그대로 도태되는 건 자명해 보인다는 판단이,
무의식적으로 쌓여왔나 싶은데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2018년,
필자 박삥이 대학생 고학년 즈음 되었을 시기였지 싶다.
2025년의 어느 날,
운동을 하면서도,
일전의 후유증 덕에
단단했던 가슴 근육보다는
'스읍..' 아쉬운 느낌이 드는 그런 순간들 속.
팔을 굽히며, "그러니까 네가"
팔을 펴며, "인정받을 수 없지"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봐."
이렇게라도 나를 다그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더라지.
당연히 건강하지 못할 방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차피 우울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내가
3초 뒤 또 헬렐레거리면서
"뭐? 어디로 오라고? 둔산동?"
이러고 있을 나 박삥이라는 사람을 내가 모를 리 없기에.
그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단 한 마디 정도는 남겨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살아보자."
당신도,
거기서 서계신 당신도,
그리고 아마 저기서 앉아있는 당신도.
그래도, 다들 살아내고 계시잖아요.
나는 가끔 묻는다.
1%는, 정말 외부에 있었을까?
혹시, 그 1%는 내 안에 있는 게 아닐까.
우리네 삶에서는
서점에 가면 이런저런 에세이들을 커피 두세 잔 값에 손쉽게 살 수 있고,
또, 책을 사면 다양한 혜택도 많아서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멋있는 분들께서 써주신 수많은 지식의 총량을 얻어낼 수 있다.
그중
'사랑받지 않아도 돼.'
'너는 그래서 괜찮은 사람이야.'
'미움받고 싶지 않은 어느 날.'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위와 같은 뉘앙스의
자기 계발 에세이들이
우리네 삶에서는 인기이고,
또 그런 몇 줄짜리 텍스트 카드뉴스가
SNS에서는 1만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기도 한다.
'괜찮아. 오늘도 수고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가끔은 울어도 돼.'
(좋아요 12.4K, 댓글: "이 글이 나 살렸어요")
하지만,
정말 그 말들이 나를 나로 살아가게 만들었는가?
슬픔을 진단하지 않은 채 해열제를 쥐여주는 처방이지는 않았을까?
나 같은 어리석은 소년이
뭘 알겠느냐만은..
문제는
인문학서의 탈을 쓴 것 같으면서도,
결국 인문학서가 아니었던 일부 책들이
때로는 정말 더 아프게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통증을 직면'하고,
'문제를 탐구'한다.
즉,
통증을 우회하고,
해답을 제공해서,
독자를 '감히'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문학,
그리고 철학은 고통을 바라보게 만든다.
"왜 우리는 불안할까?"
"사랑받고 싶은 이 욕망은 어디서 왔을까?"
"정말 당신의 욕망은 당신 것인가, 아니면 인스타의 것이었는가?"
"왜 너는 사랑받아도 되는가?"
"그러면 그는? 당신이 사랑받을 때 그가 비워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 감정의 근원은 무엇이며, 학문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뭐라 정의하는가?"
"학문적으로 그것을 정의한 근원은 무엇이며, 학문의 뼈대는 무엇인가?"
끝없는 물음표 살인마 없이,
존재에 어떻게 안심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그 말이다.
'너 괜찮아. 잘하고 있어.'
라는 말이 3초 이상을 달래줄 수가 있냐는 그 말이다.
'너 괜찮아.'
라고 말해놓고, 그를 떠나도 된다는 윤리적 허용 모델을 스스로 삼지는 않았냐는 그 말이다.
계속된 물음에
계속된 답변을
약속해 본 적이 있냐는 그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찾는다.
10만 원어치 자기 계발 에세이를 이미 사놓고도,
나를 더 고통의 아지랑이 속에 빠트릴 어느 사건이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궁금하니까.
나를 달래줄 무엇인가가
도대체 이 세상에 있는지 너무 실망스러우면서도, 기대되니까.
우리는
누군가의 말 한 줄에 기대고 싶어진다.
"너 잘하고 있어." 말고,
"너 잘하고 있는데, 새끼발가락 그러다 부러진다 ㅋㅋ 나처럼 해봐.. 에쿵.. 나도 부러짐 미안;; 이번거 실수였음;; 다시 보여줄게;;;; 나 원래 잘함;;;"
라는 말을 듣고 싶기도 하다.
결국 인문학은
'일캐 하삼 ㅇㅇ' 이라는 말 대신,
곁이 되어주는 학문이기도 하니까..
인간이니까..
감정의 이름이 없을 때,
시간은 감정의 구조를 대신 살아준다.
성실하게, 정직하게, 노력하며,
시간과는 우정을 쌓아가는 것이 우리네 발버둥인데,
어떤 진리들은
시간과의 우정보다는
잘 완성된 기성품을 선호하기도 한다.
잡으려 하면 도망가고,
기다리면 소식 없고,
애쓰면 외면하는 것들이 있더라지.
"나는 마음밖에 없는데, 그 마음이 뭔가를 지키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먼저 꺼내 들지.
계좌 잔고,
신용 등급,
대출 한도,
자동차 키,
주식 수익률.
자격증 갯수,
공모전 이력,
입시 결과,
링크드인 팔로워 수,
SNS 좋아요 수.
스펙,
지갑,
배경,
몸,
외모,
그리하여, 권위라 불리는 것.
마음 하나로는 안 되니까.
그 마음이
뭘 지킬 수 있는 시대는,
아니, 애초에 존재한 적이 있었나 싶으니까.
"나는 마음밖에 없는데, 그 마음으론 아무것도 지킬 수가 없다."
이 물음에 닿아야만
한 걸음 더 계단을 오를 용기를 갖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에게도 위로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위로하려는 순간,
그건 감정이 아니라
해결이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저,
이 이상한 감정이 내 안에 사라지지 않도록
시간 속에 묶어두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글을 쓴다.
그럼 내일도 살아진다.
글을 쓰는 행위가 위로로 이어지진 않는다.
다만 버텨는 진다. 시간이.
나는 다시 묻는다.
감정의 이름도 없고, 구조도 없는데,
도대체 그 감정을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 있을까?
"성공했다는 인간들마저도 왜, 신을 찾는다고 생각해?"
"나는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는 사랑받고 있는지 확인받고 싶어서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만드는 절대 날 떠나지 않은 불변의 원형을 만들으려는 인간의 '욕심'이라고 생각해."
며칠 전, 친구와의 대화였다.
그 친구는 내 속의 그냥 나였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을 욕망하는 이유는 단순한 종교적 욕망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결핍이 아닌 충만에서,
불안이 아닌 창조의 욕망에서
그 원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가 말한 '욕심'은
이기적 집착이 아니라
사랑을 증명하고픈 감정의 극한에 가까웠다.
신은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았지.
신학적으로 아닐 수도 있겠지만.
신은, 믿음은,
우리 인간이 만들었지.
공포와 경외, 그리움과 바람이
오랜 세월 축적되어 하나의 구조물이 되는 것.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구조물을 철저히 자각하면서도,
스스로 만든다는 책임까지 떠안겠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외로워서 신을 만들기도 하겠지만,
떠날 수 없는 존재를
남기기 위해 신을 만들기도 하고,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구조화하려는 기획이기도 하지 않을까.
"떠나지 않는 존재는 어디에 있을까."
"나조차 나를 떠날까 봐, 그래서 나보다 먼저 날 기억해 주는 존재가 필요해."
결국 '관측자 효과'의 끝단에서
존재를 실현시켜 주는 존재를 창조하고 싶었던 것.
어쩌면,
우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이기심.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욕망.
그럴 수는 없는 걸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때로는 브랜드를 기획하고,
때로는 로직을 교육하고,
때로는 정체성을 창작하고,
때로는 디자인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영상을 편집하고,
때로는 견적서를 구성하며,
때로는 PM의 위치에서 거래처를 컨트롤링하고,
때로는 그리하여 돈을 버는 평범한 청년이지만.
그 모든 뿌리에 '글'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봐주면 짱좋긴 하다)
내가 만든 구조물 안에서 어차피 살고 있을 거니까.
비가 올지라도,
나는 나에게 우산을 건네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비를 맞더라도,
그게 내 마음을 씻어내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으니까.
어차피 인간은,
날씨 예보를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면서도 가증스럽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존재가 있을까 기대하는 게 결국 인간이고,
그 나약한 인간이 정확히
"나"라는 사람의 심장을 저격해 꿰뚫어버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런 나약한 인간을 아직 좋아한다.
내가 그 인간이기도 하니.
그래서 나는,
내일도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MAY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