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보호란 없다.

삶은 불안과 사랑의 동행이다.

by 삥이


1미터(m)의 충격


때는 1909년 10월 16일,


미합중국 제27대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인류사에 남을 역사적 회담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합중국 제33대 대통령이었던 포르피리오 디아스(José de la Cruz Porfirio Díaz Mori)를 만나기 위해 엘패소(미국)-시우다드 후아레스(멕시코)가 맞닿은 국경으로 향했다.


당시 태프트 대통령은 4,000명에 달하는 군사적 경호, 텍사스 레인저, 비밀경호국, FBI 요원 등 그 시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안전'의 장치를 총동원한 채,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견고한 보호막 속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방어 체계는 한 인간의 돌발성과 우연 앞에서 얼마나 허약한지, 이날의 사건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2세의 아저씨, 줄리어스 버거슨.

그는 손바닥에 감출 수 있는 작은 권총,

Protector Palm Pistol을 품고

미 대통령과 불과 1미터 남짓한 거리까지 다가갔다.


경호원들이 그를 제압하지 않았다면, 역사의 흐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를 일이지.


태프트 대통령은 이후 "나를 노린다면 이렇게 쉬운 표적을 놓칠 리 없었을 텐데요"라며, 자신의 뚱뚱한 체구를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감정은 아마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였지 않았을까.



표적이 된다는 것,

수천 명의 경호 인력과 장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단 한 사람의 돌발적 의지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누구나 잠재적 위험이 될 수 있고,

숫자와 시스템이 결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줄리어스 버거슨의 존재는 한 시대의 경고였고,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1.png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왼) / 포르피리오 디아스(오)





<Ludovico Einaudi - Nuvole Bianche>

불안과 사랑이 조용히 맞물리는 시간의 피아노.




왜,

우리는 보호 대상이 될수록 불안해지는가?


태프트의 농담은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자도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공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최고 권력자일수록,

가장 많은 보호를 받는 존재일수록,

외려 더 깊은 취약함과 마주하게 되는 역설.


태프트 암살 시도 사건(Taft–Díaz Summit Assassination Attempt; 차미살 분쟁 중 정상회담 암살 미수 사건)은 '안전'이라는 환상을 산산이 부쉈던 사건인 것이다.


완벽한 보호란 없으며,

우리는 결국 공포와 불안을 껴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역사는 조용히 일러주었다.



삶의 감정들은 언제나 공존한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외로움,

그리고 안도와 불안까지.


태프트의 암살 미수 사건은

'공포와의 공존'이라는,

인류에게 남겨진 오래된 교훈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줬다.


완벽한 보호는 없고,

우리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그래, '삶'이라는 이야기 말이야.






공포는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 인간은 늘 달콤한 꿈을 품어댄다.

현실이 힘들어도 꿈은 달콤하기에 기대를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여린 이들이다.


플랜 A부터 플랜 Z까지 세워둔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부 디테일을 수정하기도 하고,

사건의 흐름에 따라 "이건 안 되겠다"라며 하나씩 소거하기도 한다.


미래에 내가 지킬 연인,

그와 함께 감싸 안을 자녀 계획까지.






공포는 늘 우리 곁에 있다.

그것은 단지 죽음이나 상실, 위협의 그림자만은 아니지.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외려 두려움이라는 감정마저 품어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키고 싶은 것,

잃고 싶지 않은 사람,

그 소중함이 커질수록 잔바람에도 불안이란 불씨가 일렁인다.


태프트 암살 미수 사건에서 그가 마주한 공포 역시,

결국은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 '국가와 국민,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지 않았을지 감히 상상해 보는 요즈음이었다.


완벽한 보호란 없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완벽한 보호'는

단지 더 단단히 사랑하고,

단지 더 깊이 서로를 껴안는 것뿐이라는 역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던 요즈음이었다.






사랑은 불안을 품고 걷는 감정일 수도 있겠다.

불안은 사랑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달고 다니는 그림자가 될 테지.


그러니 우리가 불안해하는 날은, 결국 사랑하고 있는 날이기도 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더 간절하다.


'나'라는 인간은 매우 작은 존재이기에,

그래서 종종 신(神)이라는 작자를 찾아댄다.


신에게 비나이다.

당신에게 비나이다.

나 자신에게 비나이다.


부디 바라옵소서.

내가 나를 잃지 않고,

내가 당신을 잃지 않기를.






우리가 바라는 모든 안도는,

결국 사랑을 지키고 싶다는 소망이다.


불안은 그것을 지키려는,

우리의 가장 인간다운 본능일 뿐이지 않을지 싶다.


역사는 공포를 기록하지만,

우리는 그 공포에 이름을 붙인다.


마치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철학'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이름은 웬만해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사랑은 공포보다 한 발 늦게 도착하지만,

그럼에도 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찬란한 이름이기도 하였다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그러나 그 현기증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덴마크)


아,

제가 불안에 떨며,

제가 걱정을 품고,


내일의 행동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잠시 뒤 건넬 말을 미리 떠올려보는 것은,


사실 모든 순간에 사랑이 깃들어 있기에 그랬던 거였나 봅니다.



보호.jpg 완벽한 보호란 없다, 삶은 불안과 사랑의 동행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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