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의 탈을 쓴 신(神)

이렇듯, 맹점은 마지막 종결어미에도 있다는 것.

by 삥이


됐다!!!!!


팔린다.




























됐어!!!!!


유통되잖아.

























어라,

전쟁 났네.



















자,


인류사 이래로

자본주의와 마케팅을 엮은 세 문장이다.




믿음은 팔린다.

맹신은 유통된다.


그리고 신념은 전쟁이 된다.




언제나 그랬다.


가장 잘 팔리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저 100점 맞았어요!"

라는 자신에 찬 한 마디보다,


"근데 쟤 누구랑 노는 애 아니야?"

라는 수군수군 몇 마디가


절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절대 진리인 양 여겨지는

그러한 경우도 있다지.




그 믿음은 때로는 구호였겠지만,

때로는 로고타입이었겠지만,

때로는 '믿으면 이루어진다'라는 슬로건이었겠지만,



인류는 눈앞의 현실보다

눈앞의 믿음을 택해버렸고,

그 틈을 자본은 절묘하게 꿰뚫었다.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의심 없이 맹신하는 소비자가 필요했으며,

결국 모든 믿음에는 가격표가 붙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믿음을 들고 칼을 들었고,

이데올로기는 믿음을 들고 국가를 세웠으며,

애플은 믿음을 들고 상품을 팔았다.




믿음은 언제나 위대했지만,

위대한 것들은 대체로 피를 요구했다.


믿음이 있는 곳엔 늘 희생이 따랐고,

그 희생은 '정당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어떤 믿음은 사람을 구했고,

어떤 믿음은 수백만 명을 죽였으며,

어떤 믿음은 매출을 일으켰다.



믿음은 감정이었지만,

곧 구조가 되었고, 시스템이 되었으며, 상품이 되었다.





현대는 더 이상 신(神)을 믿지 않는다.












Chap 01.

인간은 왜 믿음을 욕망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믿기 시작했을까?




사실,

신(神)은 어쩌면 필요 없었다.




처음부터 인간은 신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종(種, Species)은

모르는 것 앞에서 너무나도 약했고,

그 약함을 견디기 위해 '믿음'이라는 이름의 감정 장치를 만들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설명할 수 없는 질병.

내일 올지 모르는 해.

그리고 죽음의 이후의 세계.



모든 불안은 믿음이라는 감정의 구조물을 형성해 왔다.





믿음은 종교보다 신화가 먼저였다.




신화는 당시 대중들에게 '믿음'을 전파하려는 작가들의 욕심보다는 그저 세상을 이해하고 견디게 하려는 이야기의 형태였다는 설(ssul)들이 대중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는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썰.

판도라의 상자 속 마지막 남은 '희망'에 대한 썰.

홍수 속 노아가 방주에 탑승해야 했던 썰.



모든 썰은 곧

희망이 되었고,


그 희망은 믿음이 되었으며,

인간의 지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사람들, 악한 부자들을 벌하기 위해

때로는 지옥의 세계관을 구체화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우리는 신화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는 대신,

'해석'함으로써 마음의 균형을 잡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끔은 마음이 흔들릴 때,

어떤 대상을 통해 믿음을 확고히 하는 때처럼.







믿는다는 건 단순히 '좋다'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믿음이 현실을 바꾸진 않지.

하지만 믿고 있다는 심리적 질서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알약 두 봉지' 즈음의 역할은 수행한다지.



그러니까,

믿음은 언제나 객관보다 주관,


그러니까,

믿음은 언제나 사실보다 그저 썰,


정말 정말로,

결과보다 해석에 기초해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그래서 인간이라는 생물군이.




(믿음을 가진 종교인들과 신학자님들께 불편을 드렸다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진실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자의 감정적 선택이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Chap 02.

믿음은 어떻게 념이 되는가.





믿음은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감정이 아닌 '집단의 명령'이 되던 때도 역사 속에는 분명히 존재해 왔다.


역사 공부를 재밌어했다면,

아마 전쟁의 원인이 그저 신념에 의한 때도 많았음을 기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위로였던 것이,

나중에는 질서로 형성되고,

그리고 결국 지배가 되기도 하는 것이 믿음이다.




감정이 구조가 될 때,

그 구조는 의심을 제거하고,

확신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확신이 무섭지.



질문을 금지하고,

다름을 처벌하며,

자기 논리 안에 세계를 가두기도 하잖아.



신념이 구조화되는 순간,

인간사는 수많은 참사를 되풀이해 왔다.







십자군은

정복이 아니라 '해방'이라 불렸다.



히틀러는

혐오가 아니라 '정화'라 불렀다.



마케팅은

조작이 아니라 '브랜딩'이라 불리고 있다.




신념은 언제나

자신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한다.



신념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그것이 너무 '옳아 보일 때'인 것이다.





믿음은 감정이었고,

신념은 구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자 한 번 물어본다.






질문 없이 따르는 맹신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정말 믿은 걸까?





아니면,




믿지 않으면 무너질까 봐 맹신했던 걸까.







누군가에겐 구원이,

누군가에겐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





때로는 마음이 너무 아플 때도 있어.




그런데 할 수 있는 건 없긴 하지.
















Chap 03.

인은 사랑하면 안 된답니까?





나는 앞을 볼 수 없다.


시력이 낮아서.


는 뻥이고.





정확히는

앞이 보이지 않을까 봐,

매일 두려워하며 산다.





우리는 맹신을 비난하지만,


사실 그 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가장 절박한 방식이기도 하다.



사랑은 늘 확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때로는 눈을 감는 용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 사람은 안 변해."

"이번엔 정말 잘 될 거야."

"나는 아직 괜찮아."




이 문장들은 어쩌면 모두

앞을 보지 않기 위한 주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질문을 하면 무너질 것 같았고,

의심을 품으면 사랑까지 사라질 것 같았기에.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아니, 비겁하게 우리 말고,




나는,




신을 맹신했고,

사랑을 맹신했고,

성공을 맹신했고,

심지어 나조차도 맹신했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맹신은 늘 파멸을 부르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생각보다

살아남는 게 더 시급했던 사람도 있다는 것.





그 사람은 맹인이 아니었다.





그저


내일이 너무 멀고,


지금이 너무 버거웠을지도.









묻는다.



맹인은 사랑하면 안 됩니까?





눈을 감은 사람은 죽은 존재입니까?







그 사람,




저렇게 멀쩡히,




숨 쉬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쉽게 돌을 던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Chap 04.

그래, 심하니까.






우리는,

인간은,

심심하니까.



살다 보면

변주가 필요하고,

익숙함이 지루해지고,

의미조차 반복에 닳아 없어지는 존재니까.



그것이 인간이라는 특수성이니까.



품었지만

외려 놓을 때가 있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했기에 이별을 말할 때도 있으니까.



배고프다고 말하지만

뱃살 때문에 굶을 때도 있으니까.



보고 싶지만

부담일까 멀리 떨어질 때도 있으니까.



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귀찮아서 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심(心)심(沈)한 존재니까.



심장은 여전히 뛰지만(心),

감정은 어느 날

소리 없이 가라앉기도 하니까(沈).





꽃.gif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며 넘어지기도 하니까.




심장은 뛰지만(心), 감정은 가라앉을 때(沈)가 있으니까.



그렇게 인간은,

심심하게 살아가고 있다.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며

넘어지기도 하니까.


















그런데,



신(神)은 있더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필자도,



신(神)을 봤더이다.







인간은 왜 '믿'음을 욕망하는가.

구조이니까.


믿음은 어떻게 '신'념이 되는가.

옳아 보이니까.


'맹'인은 사랑하면 안 됩니까?

저렇게 숨 쉬고 있는데.


그래, '심'심하니까.

재밌기만 하진 않던데.



믿었다.

옳다고 여겼다.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지루해졌다.

그저 살아내기 위해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그 모든 건 감정이었는데,

언제부터 그것들이

논리, 전략, 이익에 그치고 말았는가.


아니더라,


믿음이 구조가 되고,

념이 폭력으로 바뀌고,

신이 조롱받고,

심함이 죄처럼 여겨지는 요즘 세상에도


신(神)은 있더이다.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다

넘어지던 과정 중 신(神)을 봤더이다.







현대는 더 이상 신(神)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미치도록 갈망하니까 믿지 않는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맹점이다.





독일 제국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단지 종교의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의미의 해체,

가치 중심의 붕괴를 선언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신격화했고,

산업화는 신을 시장으로 대체했고,

현대는 모든 믿음을 데이터와 통계로 환원해 버렸다.



신은 사라진 게 아니라,

편익 분석 앞에 무력화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믿는다' 보다는,

'검증됐다' 라는 말에 조금 더 안심하기도 하잖아?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뭔가를 믿고 싶지.




그렇게,


있었는데,




그랬는데,


그저 있었는데,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다,


넘어지던 과정 중 신(神)을 봤더이다.








신은 감정이었고,

감정을 회복하는 일은

다시 사랑하는 일과 같더라지.









아,

이상처럼

추상적이었나이까?







아니요,

물리적 증명,

플랫폼 알고리즘이었나이다.












이렇듯,



맹점은 마지막 종결어미에도 있다는 것.










그저 웃긴 것.

곁에 있었는데

그걸 못 봐가지고

한참을 돌아서야 겨우 봤던 것.









결국,


감정이라는 것은


당신이라는 위대한 존재는,


맹인의 탈을 쓴 신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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