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침전물처럼

말해지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은 사랑에 대하여

by 삥이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진리가 있다면,


수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감정은 틈으로 스며든다는 것이다.




비틀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있다면,


빗물은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누군가의 말 한마디는 내 기억의 벽지로 번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해석할 수 없는 자연의 가치가 있다면,


머무는 것엔 중력이 작용하지만,

스미는 것엔 시간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情은 물과 같아,

입은 곳을 적신다.


감정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지만

물처럼 스며드니,


가장 얇고 가장 깊은 데를 먼저 적신다.


무릇 '스며든다'는 말은,

그저 머무는 것보다 더 깊이 배는 것이라지.




당신은,


중력인가, 시간인가


온도인가, 습도인가


기억인가, 감각인가


관심인가, 기대인가


의도인가, 실수인가


동행인가, 그림자인가


닿은 건가, 들러붙은 건가


죄인가, 구원인가



아니면,

스민 건가, 붙잡은 건가.



물어야겠지.














어떤 냄새는





어떤 냄새는,

세탁기를 두 번 돌려도 빠지지 않는다.



옷을 다 널고, 다 마르기까지 기다렸는데도

그 냄새는 끝끝내 남기도 한다.



무심하게 맡은 줄 알았는데

그건 '스쳐간' 게 아니라 '스며든' 것이었다.



오래된 책장에서 풍겨오는 종이 냄새처럼,

어렸을 때 운동장에서 맡았던 흙 내음처럼,

저 멀리서 내가 하교하길 기다리던 어머님처럼,



어느 날에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누군가의 행동 하나가,

감정 속 깊은 잔상이 되어서

스며들어 평생을 머무르는 때가 있다.





감정은,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람을 덮는다.




나도 모르게.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러니 그대,

누군가의 마음에 '머무르며' 힘들어말고,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존재하라.





그곳은 따스할지도 모르잖아.














스며든다, 감염된다, 존재가 된다.




감정은 물처럼 스미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바이러스와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웃으며 넘겼던 그 순간 이후로도

마음 어딘가에서 계속 증식하고 있었다면.



만약 당신이 그런 상태에 놓였다면

그것을 스쳐간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잠복기 중인 감정일지도 모르는 것이지.





/

인체로 말하자면,

감정은 항상 자율신경계부터 건드리는 법이다.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말은 안 나오고,

괜히 손끝이 차가워진다.



피검사로는 안 잡히지만,

감염된 건 분명해 보이기에 진료를 받아야 한다.



???: 심기허증 자가진단해 보세요.





/

자연으로 말하자면,

감정은 불씨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화를 내면 그 옆은 긴장하고,

한 사람이 울면 그 옆은 조용해지기도 한다.



감정은 말보다 먼저 전파되고,

그 속도는 늘 예측보다 빠르다.



내가 모르는 사이.



화내려다가도 참고 있다면,


아니 화라는 감정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번짐일까.






/

컴퓨터로 말하자면,

감정은 알고리즘이기도 하다.



내 감정은 정말 내 것인지부터 의심해야 되는 이론(logic)인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클릭한 것만으로도

그 감정이 번져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비교하거나 상대적 심리감을 느끼거나.







그러니 감정이 스민다는 건


그냥 '기분이 남는다'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



어딘가에 감염되었고,


그 이후로 내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물처럼 스미고,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결국은 나를 바꾸는 것.



스미다.




그러니 부디,





말이,


행동이,




누군가에게

첫 번째 증상이 되지 않기를





조금은 바랄 뿐이다.












다만 모든 감정이 스며들 수는 없는 법이다.




말을 했는데 못 들은 척하는 사람도 있고,

웃었는데 반응 없는 눈빛도 있고,

같이 있는데 같이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때도 있다.



필자가 밤마다 재생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억제하려 해도 억제할 수 없는 것이 그 슬픔이요 막아버리려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감정이라서 부자간 천륜으로 볼 때 그 원수가 저기 있어 앉으나 서나 눈에 걸리었다."



해당 구절은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가 남긴 말 중 극히 일부이다.



무수한 권력과 형식 속에서 감정이 차단된 흔하디 흔한 왕가(王家)의 이야기. 하지만 이를 인간사로 들여다보면 존재할 수천만, 수억 가지의 슬픈 이야기 중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 중 하나.



감정은 머물지도 못했고,

또 감정이 스미지도 못했다.



다만,

정조라는 인간 안에 쌓였고,

결국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가 했던 사랑은, 기록으로만 스며들었다.






사랑이 관통하지 못하는 시대,


감정은 그렇게,


문장 하나로 조용히 죽어버렸다.






이는 우리네 주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장금이의 꿈>에 나오는 등장인물 민정호.

만 18세의 나이에 내금부 소속, 내금위 종사관의 직책을 가진 자. 장금 일생의 유일한 연모(戀慕)의 대상.



민정호는 장금의 손을 잡지 않는다.

손을 내밀 수도, 뻗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감정은 있었지만,

감정으로 말할 수 없는 시대도 인간사 수두룩했다지.



장금은 의술로 사랑을 표현했고,

민정호는 무술과 기다림으로 감정을 감싼다.



애당초 조선 사회 법도가 그렇다.



의녀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기록으로 남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장금과 민정호가 같이 길을 걷는 것조차 의녀와 무사와의 신분 아래에서만 허락되었기에,



민정호는 보금자리를 건넸고,

장금은 약재를 건넬 뿐이었다.



스미지 못한 감정이

스밀 수 있는 세상에 닿았기에

<장금이의 꿈>이라는 작품이

MBC 대히트작 중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스며들지 못한 감정도,


스미지 못한 채 끝나버린 마음도,


결국은 어딘가에 남는다.





말로는 아니어도,


기록으로는 아니어도,


누군가의 뇌리 어딘가,


기억의 가장 연약한 층위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 대신 닿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도입을 물리학으로 잡았으나


본문을 다학제적으로 잡았으나


엔딩을 역사로 살펴보았으나





결국,

이 따스한 감정을 어찌 풀지 몰라 발 동동 구르며 이리저리 메만졌을 뿐




결국,

'스며든다'라는 현상을 막을 수 없는



한낱 인간이었더이다.















오늘은 '스미다'라는 한 단어에 집착해 감정을 풀어보았습니다.



저도 한 번은 스미듯이

존재를 내미듯이

다가갔던 적이 있나 궁금할 때도 있더군요.



독자님들에게 '스미다' 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시나요?




지금까지 브런치에 68번째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본, @삥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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