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금을 줄이고 싶어요.

그저 칼퇴하던 사람에게도 물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순간

by 삥이


런치플레이션.



2022년 6월이 끝나갈 무렵,

나는 이 단어를 tistory라는 플랫폼에 썼었던 기억이 있다.



현상보다 분위기가 먼저 끓던 시절이었다.



'Lunch'와 'Inflation'의 결합.



점심 한 끼가 고통이 된 시대를 설명하는 말치고는

참 담백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고르며

가격표를 두 번 보게 만드는 세계적 핑계가 되었고,



그 무렵

평균 급여 200~300만 원을 받던 대한민국의 절대다수,



그중에서도 이제 막 첫 회사에 들어가

'사원'이라는 이름표를 받기 시작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청춘들은,



계산대 앞에서 망설이던 손끝 하나에도 예산을 부여해야 했다.



편의점 도시락조차 부담스러웠던,

그게 그 시절의 '평균'이었다.




그랬을 걸?





<곽진언 - 일종의 고백>







죄송해요.. 기부금을 줄이고 싶어요.





도덕책은 늘 말하곤 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2만 원이라는 거금을,

알바조차 시작 못한 나이 때부터 내왔다.



어르신분들의 도시락에

한 보탬될 수 있다는 그 설렘이

내 지갑을 열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2만 원어치의 정의감 대신

1만 원어치의 눈치를 택하던 때가 있었다.



"죄송해요.. 기부금을 줄이고 싶어요.."



그 한 마디를 하려고,

'1811-0000'을 누를까 말까

수십 번 망설이던 밤이 있었다.



결국 지금은 기부금이 줄었다.



그런데,

내가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수십밤을 망설이게 될 것 같다.



지금도 말하고 싶다.

정말 죄송하다고.



보잘것없는 2만 원이었겠지만,

나는 당시에 손이 떨렸다고.



요즈음은

'좋은 마음'조차 비용으로 계산해야 한다.



이게 내 탓일까, 시대 탓일까.



모르겠다.








잘 내심까 본부장님 ㅋㅋ





지난주 금요일,

내가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조인하려고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될지 몰라서

아는 회사의 본부장님께 안부전화를 올렸었다.



"잘 지내심까 본부장님 ㅋㅋㅋㅋ"



본부장님이 바로 던진 첫마디는,



"잘 지내겠냐 ㅋㅋ 죽겠다 ㅋㅋ 애들 징징거릴 줄만 알고, 말도 디럽게 안 듣는다 ㅋㅋ"



내가 말했지.



"제가 요즘 본부장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ㅋㅋ 어떻게 버티셨어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요즘은 그런 마음조차 '번아웃'의 대상이 된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좋은 사람 코스프레는 아닐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나조차 나를 판단할 수가 없더라.



당신은 어떠할까.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 당신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내 눈엔,

당신의 속이

아직 검어보이는 것을,

내 어찌 뒤집을 수 있으리오.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부류가 있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A.

탐구를 좋아하는 B.



각각의 개체로 놓고 보면 둘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잘나지도 못나지도 잘 나가지도 잘 못 나가지도 않는 그냥 "개체 1"에 불과한 존재 '둘'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의 영향력이 세지면

필히 한쪽은 물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회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먼 쪽으로 물들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아쉬운 결말을 보겠지.



리더의 포지션에서 살다 보면

A와 B 중 한 곳은 잘라내야 하는 때가 온다.



실력은 월등한데 팀원의 평균을 깎아먹는 A 덕에,


실력은 평범하지만 탐구하는 B, C, D, E조차 영향을 받아 무너지고



법인 전환은커녕,

월 매출 5천만 원 찍었다고

축배를 드는 순간조차,

사실은 천장에 금이 가고 있는 집일 수 있다.






여기서 가증스러운 종자는 하나다.



리더이다.



가증스러워서,

둘 다 붙들려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를 내칠 생각을 한다.



현답은 어디에 있을까,

알지 못한 채로.






리더는 언제나,



스스로를 속이며 리더로 남는다.










사람 안에 두 마음이 있다.





지하철에서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옆에 임산부 배지를 단 여성이 서 있었지만,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척하고 있다.


다음 역에서 내릴 거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카톡으로 기부 단체 알림이 왔다.

"한 끼 3천 원, 오늘도 아이들에게 식사를."

손가락을 움직이다 멈춘다.


커피 쿠폰 하나를 결제하며.





횡단보도 앞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노숙인을 봤다.


무심코 가던 길을 갔다.


그러다 우산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쇼윈도에 비친 것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택시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길에 쓰러진 오토바이를 보았다.


"괜찮으세요?" 하고 내리고 싶었지만,

기사는 이미 신호를 밟고 있었다.


나는 그냥 허공에 "괜찮으시길"이라고 속삭였다.







이게 인간이었다.


나라는.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회피하려는 핑계가

하나의 심장에서 동시에 뛴다.



선함과 가증스러움은 별개의 얼굴이 아니다.



늘 같은 얼굴 위에

빛과 그림자처럼 겹쳐 있다.



그래서 나는 모른다.




나는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착한 척하는 사람일까.









뉴스에서 흘러나온다.



1만 원 점심비를 8,000원에... 정부 '밥값 지원' 두고 갑론을박




언론사의 표현은 '밝고', '희망적인' 단어를 붙이겠지만,


그 아래의 반대 언론사에서는 또 다른 워딩을 띄운다.


"내년 국가부채 1,400조 돌파."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첫 50% 돌파."




나는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200원을 망설였는데,

국가는 천조 단위를 이야기한다.



나는 2만 원을 1만 원으로 줄이는 전화를 하며

밤새 손이 떨렸는데,



정치인들은 수천억 원, 수조 원을 '지원'이라 말한다.



내가 가진 눈치와, 그들이 가진 정의는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더 쉽게 물어보자.



나는 여전히 1만 원을 내며 죄송하다 말하지만,


국가는 1,400조를 빚내며 '도와주겠다'라고 말한다.




정의란 어디쯤 있을까.


개인의 떨림일까, 국가의 선택일까.








정의란 어디쯤 있을까.



플라톤은 각자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정의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여에 따라 몫을 달리 주는 것이 정의라 했다.


공자와 맹자는, 정의를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 했고,


롤스는 보이지 않는 베일 뒤에서라면 누구도 약자를 희생시키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웃긴 건 ㅋㅋ



플라톤의 사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몫도,

공자와 맹자의 도덕도, 롤스의 베일도,

사실은 모두 현실에 없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성현들의 정의는 아직까진 허구에 존재하던 추상적인 것이었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나는,

2만 원을 1만 원으로 줄이며

"죄송합니다"라고 떨던 그날 밤을,

차라리 나만의 정의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비겁하지?





그래서



리더는 가증스러운 종자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며 남는 자리다.





내가 팀원이었을 때는

그저 칼퇴를 바라며 살았는데,



내가 대장이 되고 난 뒤에는

팀원을 아쉽게 바라보게 될 때도 있다는 것을,



몰랐어.










지겹도록 또 한 번 묻는다.


정의는 어디있는가.


인간이 수천년동안 물어도 대답 한 번 나오지 않았던 그것.




정의는 언제나 저 먼 곳에 있다고,

성현들은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말했다.




어쩌면 정의는

멈칫거리는 그 사이,

아직도 묻는 이 질문 속에만 있는 게 아닐까.




당신네들은 물어야 한다.




눈앞의 타협 말고,

정말 그게 괜찮은 건지.






당신은,






끝까지 묻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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