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죄인인가요, 성인인가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를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창세기 22:2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창세기 22:10-12
인간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신은 이렇게 잔인한 시험을 주었는가?
'존재 자체'. 그 이름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 하셨다.
번제. 즉, 불에 태워 바치는 제물로.
우리는 그것을 '신의 뜻'이라며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런 잔인함을 경외로서 수용하면서,
누군가의 소설,
누군가의 영화,
누군가의 음악 속에서
사람의 눈을 꿰매는 장면을 쓰면,
그것은 왜 '불쾌한 상상'이라며 눈을 돌리는지 말이다.
왜,
왜,
왜 당신네들은 선택적인가.
소설의 잔혹은 왜 용납되지 않는가.
그 간극은 무엇인가.
잔혹함은 정말,
누구의 선택인가?
창조의 이름으로 허락된 신의 잔혹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도 허락될 수 있는가?
<Sub Urban - UH OH! (feat. BENEE)>
CHAP 01.
어느 날, 필자가 존경하는 어느 인물이 책 한 권을 소개해줬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Agustina Bazterrica)의 『육질은 부드러워(Tender is the Flesh, 2017)』라는 책.
고기를 대신해 인간을 먹는다는 충격적인 소재로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조망하게 만드는 책으로서 이 책의 권위는 이루 말할 것 없는 수준이다.
물론, 내용이 내용인지라 '전부다'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었다.
필자가 해당 소설을 읽으며 느낀 감정은 아래와 같다.
사랑. 사랑. 사랑..
"식인은 불법이 아니었다. 다만, 감정이 불법이었을 뿐이다."
잔혹한 현실보다 무서운 건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세계일 것이다.
만일,
모두가 무단횡단을 해도 된다는 법을
입법부와 행정부가 그 규칙을 당연시하며,
'지나가는 차를 무시하고 건너라'는 세상이 된다면,
당신은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불법'을 저지를 용기가 있는가?
시속 60km/h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을 무시한 채 그대로 건너는 '합법적인 행동'을 행할 용기가 있는가?
제도화된 폭력은
우리의 입을 가장 조용히 틀어막는다.
작 중 주인공인 마르코스는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식용 인간(가축)'인 재스민을 품에 안았다.
이름조차 정의해선 안 될 존재,
'재스민(Jasmine)'.
하지만 그녀(가축)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르코스는 다시 관계의 윤리를 회복하게 된다.
그 윤리야말로
이 세계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지.
식용 인간에게 감정을 품고,
식용 인간을 지키려 하면서,
동시에 관계를 맺길 희망하면,
본인은 물론 관련된 인물까지 모두 다
'식용 인간' 형벌을 맞이하는 세계관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절대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간의 윤리」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결국,
감정을 회피하는 법을 배워야만
어찌어찌 살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혹은
이 세계의 진짜 두려움은,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버리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관계를 만들고,
관계는 감정을 부르고,
감정은 잔혹한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 잔혹은, 결코 작가의 선택이 아니었을 테지.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합의였고,
그 합의가 만든 시스템의 풍경이었을 지도.
그러니 다시 묻자.
잔혹을 선택한 건 누구인가?
정말, 그것이 불쾌한 상상이었을까?
우리는 고기를 먹는다.
누군가의 노동을 소비하고,
감정을 감정 아닌 것처럼 대하고,
거리를 두고 관망하며,
애써 인간적이지 않은 듯 굴기를 배운다.
『육질은 부드러워』는 픽션이지만,
그 글을 읽는 우리가 자각하는 것은 결국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다 읽으면,
판타지가 아니라,
잔혹한 현실 앞에서,
한 가지 물음을 갖게 되지.
"작가 당신은 어디까지 보셨나이까."
아니,
"당신은 몇 번을 다시 일어서신 겁니까."
CHAP 02.
어느 날, 필자가 따르는 어느 인물이 영화 한 편을 소개해줬다.
『어글리 시스터(The Ugly Stepsister, 2025)』
노르웨이가 또 사고를 쳤다고 소문이 '자자해질 것 같은' 작품의 향이 스멀스멀 느껴진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에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은, 보지 못해도 느껴지는 아우라.
즉, '결(格)'이라는 '기(氣)'가 매우 강력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Lamentatio Visūs.
우리는 그녀를 보는 걸로, 그녀를 찢는다.
Lamentatio Figurarum.
신데렐라여, 당신의 아름다움은 왜 울고 있나이까.
Den Stygge Stesøsteren.
추녀. 의붓동생. 사랑받지 못한 여자.
그리고,
예뻐지고 싶었던 여자.
신데렐라 동화를 뒤틀어냈다고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추함'이라 불린 얼굴을 비로소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 시도를 펼친 듯싶다.
이제, 청중은,
그 중심을 보기 전부터 이미 불편하다.
구두가 발에 맞지 않으면, 맞게 만들면 돼.
신데렐라라는 작품의 중심 문장이다.
하지만 그것을 읽자면 또 이렇게도 읽힌다.
몸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몸을 바꾸면 돼.
예뻐지기 위해,
눈꺼풀을 꿰맨다.
예뻐지기 위해,
기생충을 삼킨다.
예뻐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웃는다.
사람들은 이제,
좋다면서 헬렐레 박수나 쳐댄다.
진짜 공포는,
그녀가.. 아니 인간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머무르고 있다.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의 세계관에서는 감정이 불법이었겠지만,
에밀리 블리치펠트의 세계관에서는 감정이 아름다움으로 위장된다.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예쁨'을 수행해야 한다.
추함은 존재의 불능.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미소로 봉인해 버린다.
그 미소는,
예뻐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슬퍼서 무서운 미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눈꺼풀을 꿰맨 적이 있었을까.
말을 줄이고,
웃음을 떠올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훈련하던 날들.
그때 당신도,
그리고 나도,
예뻐지고 싶었던 걸까.
살아남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사랑하고, 그리고 받고 싶었던 걸까.
나는 당신이 미소 짓는 걸 본 적 있다.
너무 예뻐서, 너무 아파 보였던 그 표정.
그게 바로,
어쩌면 그것이 바로,
아무래도 그건 어쩌면,
'예쁘고 싶었던 죄'의 형벌을 받은 얼굴이지 않았을까.
CHAP 03.
그들에게 있어 신은 누구였는가.
내 감히 죄목을 짚어드리겠다.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당신은 감히 감정의 망각을 조장한 죄를 저질렀다.
에밀리 블리치펠트,
당신은 감히 아름다움을 조장한 죄를 저질렀다.
한강,
당신은 감히 고통을 미화한 죄를 저질렀다.
당신,
그리고 당신은 감히 세상을 문학한 죄를 저질렀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내 손으로 죽이길
시험받으면서 '사랑'을 감각하는 죄를 저질러,
신에게 용서를 빌어대며 삼위일체를 울부짖는다.
나는 때로,
그들이 만든 문장을 따라
다시 그들의 삶을 더듬는 습관이 있다.
아마 기획자의 삶을 사는 내게,
직업병같은 '심리적 습관'이지 않을까 싶다.
나와 같이 걷고자 하는 의뢰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감정을 겪고,
어떤 상처를 안고 있으며,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나도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그런 마음.
그들의 문장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차마 읽는 것이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나는 문장보다 먼저
그들의 '살아 있었던 순간'을 알고 싶어지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들에게 '위대함'이라는 가면을 주었는지,
그리고 당신들은
신을 느꼈는지,
사랑을 느꼈는지,
진리를 감각했는지,
몇 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울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럼에도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있었는지,
그럼 그 무엇인가는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품었는지,
지켰는지,
살고 싶었는지,
끝내 사랑으로 다시 감싸줬는지.
그렇다면,
나도 감히 당신들을 공감하면,
나도 당신들처럼 멋있어질 수 있는지.
나도 내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그리고,
CHAP 04.
필자는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팀에서,
이름을 받고, 임무를 받았고,
아직 7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수십 건의 기획과 시스템을 쌓고 있다.
문장을 쓰고,
사랑하고,
감정했더니,
팀이 따라오더라지.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받고 태어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감정을 배우며 자란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주고받으며 '너'와 '나'가 되고,
'우리'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가끔은 그것이 팀이 되고,
도시가 되고, 국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시작은 한 사람.
'감각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결국 위대한 작가라고 불리며
대중들에게 박수를 받는 그들도
'감각한 존재'이고, 박수를 치는 나도 '감각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묻고,
어떤 답을 얻기 위해,
이런 장황한 논리를 펼치는지,
감각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한 가지 허락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나도 감히 당신들을 공감하면,
나도 당신들처럼 멋있어질 수 있는지.
나도 내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그리고,
나도 사랑해도 되는지에 대한 허락.
그 허락.
신께 물어야겠지.
'사랑하는 내 독자 이삭'을 죽이지 않아도 되겠느냐고,
경외로서 당신을 품으니 지켜도 되겠느냐고,
잔인한 시험에 본능처럼 궁금증을 품었으나,
잔인한 시험을 통과할 용기마저 가졌노라고.
결국 어쩌면,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주신 작가님들은
사실 '의도적 불쾌함'을 통해
우리에게 기분 나쁨을 공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은 잔혹해 보이지만, 그래도 감정을 품을 권리 정도는 있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라는 말을 공유하려는 목적도 있지는 않았을까.
사랑해도 되는지,
슬퍼해도 되는지,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허락을.
어쩌면 그 물음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기도 할 테지만,
스스로를 향한 윤리이기도 할 테니까.
그 물음이 없었던 사회는
감정을 제거했고,
그 대가는 인간성의 말살이었다.
나는 작가들의 문장을 훔쳐보며
그들의 고민을 좇았고,
그들의 죄를 들여다보았고,
그들의 감정을 탐닉하길 희망했다.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바보임미다)
다만 누군가 먼저 던진 질문을 따라가며,
감히 '묻는 사람'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들 역시,
우리가 고민할 질문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었다는 것 하나쯤은
감히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가,
똥 싸면서 '신은 개쩐다..'라고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듯이.
그래도 하나는 감히 깨달았다.
'감사.'
좋은 작품을 알려주신
존경하는 분과, 따르던 분께,
감사의 인사를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