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도달하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의 두 다리는 똑바르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왼쪽 다리는 바깥으로 휘어 있었다.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가 기형인 장애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가린샤는 문맹(文盲, illiteracy)으로 성장했다.
의사는 그에게 축구를 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러나 가린샤는 축구를 했고,
아니, 축구 그 자체가 되었다.
가린샤. 민중의 기쁨. Alegria do Povo.
훗날, 필자가 모 매체(삥이N풋볼_Official)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었다.
"신은 그를 위해, 규칙을 다시 써야 했다."
브라질 연방의 국민들은 늘 울고 있었다.
1950년 축구 역사상 역대 최악의 마라카낭의 비극,
우루과이에게 무릎 꿇은 그날 이후,
이 나라는 '월드컵 우승'을 국가적 명예의 문제로 삼았다.
그리고,
펠레가 탄생했고,
그 옆에 늘 가린샤가 있었다.
한 명은 신처럼 무결했고,
한 명은 인간처럼 결핍됐다.
펠레가 골을 넣고 포효할 때,
가린샤는 웃으며 드리블을 시작했다.
드리블은 전략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방식이었다.
경기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견디기 위해 했던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래서 브라질은,
그의 플레이에서 위안을 받았다.
그의 유머는 기술의 끝이 아니었다.
가난과 고단함 위에 핀, 무너져버리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였다.
<Linked Horizon(링크드 호라이즌) - 13の冬 (13의 겨울)>
'걷는다'는 행위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와 닮아 있다.
휘어진 다리로 걷는 자
우리 인간은 누구나
비틀어진 채 살아간다.
똑바로 걷는 척을 할 뿐,
누구의 마음도 완벽히 곧지 않다.
어떤 이는 사랑에,
어떤 이는 과거에,
어떤 이는 자신에게 휘어 있기 마련.
만일 인간이
항상 균형을 이루고 살아간다면,
혹은 그런 이가 있다면
그는 아마 '기계'일 것이다.
우리는 늘 한쪽이 무겁다.
한쪽은 기대고 싶고,
한쪽은 도망치고 싶고.
그래서
걷는 것도,
감정도,
늘 중심을 삐끗거리며 겨우 유지되는 일에 가깝다.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왼쪽 다리는 바깥으로 휘었던 남자.
두 다리의 길이마저 달랐던 남자.
하지만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던 남자.
가린샤.
그 나라 말로는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 산투스(Manuel Francisco dos Santos).
그런 걸음은 어쩌면,
인간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닐지 생각이 든다.
곧지 않아도 걷는 것.
부러졌어도 드리블하는 것.
내가 졸려도,
내가 힘들어도,
내가 사실 조금 아파도,
내가 사실 조금은 벅찼어도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나아가듯이.
거울처럼 걷는 자
누군가는
항상 앞을 보고 걷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항상 옆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거울처럼 걷는다.
앞을 바라보는 대신,
누군가가 자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걷는 것이다.
자신은 투명한 채,
다른 이의 방향을 반사해 주며
남을 위한 시선의 틀로 존재하는 방식.
그런 방식의 걸음은,
때때로 비틀리고,
때때로 휘어지며,
때때로 중심을 잃는다.
거울은
자신을 비추지 못한다.
(자신을 비추면 귀신이다.)
늘 타인을 위한 반사체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누군가는
자기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자기의 표정이 괜찮은지를 체크할 수 있다.
거울은 남의 감정을 비추느라,
자기감정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삶을 살다 보면
그런 걸음도 있더라.
그리고,
그곳을 걷는 이도 있더라.
그렇게,
세상은 그를 기억한다.
그는 기억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데도.
길을 만들며 걷는 자
산에 오를 때,
처음부터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등산로가 유명한 산이 아닌 산,
가령 동네 뒷산이나 유명하지 않은 어느 산은
길이 보이지 않아서 마치 '개척하듯' 뭔가를 뚫고 가야 되기도 한다.
아마,
유명한 산도
처음 그 산을 찾은 사람은
나뭇가지에 긁히고,
이끼에 미끄러지고,
덤불에 가로막히면서
길을 개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랬겠지)
그런데
누군가가 그 길을 또 오르고,
또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그 흔적은 어느새
'등산로'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 길은 누군가가
먼저 다치며 만든 감정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누군가는
먼저 감정을 꺼내고,
먼저 상처를 감당하고,
먼저 길을 만들며 걷기도 한다.
그렇게 생긴 마음의 길 위를
어떤 이는 편하게 걸어 다니며
그게 원래 있던 감정인 것처럼 누리게 된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걸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걸었는지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가 어떤 외로움으로,
얼마나 조심스럽게,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그 길을 만들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이 길이 있으니
편하다는 것만 이야기할 뿐.
그 길은 사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가느다란 오솔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휘어진 다리로 걷는 자.
거울처럼 걷는 자.
길을 만들며 걷는 자.
이들이 뭐가 특별했을까?
특별하기는 했나?
특별했나?
서사가 슬퍼서 꼭 편을 들어줘야만 하고,
그 내러티브는 꼭 완성으로 종편이 만들어져야 하며,
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냐는 말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똑같이 걷고 있었을 뿐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가게의 문을 열고,
누군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펴며,
누군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우리 인류는
지혜로운 사람(Homo sapiens)이라고 불리기 전에,
두 발로 걷는 사람(Homo bipedalis)이라고 불렸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유의미한데,
이족보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먹이를 나르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등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
그렇다.
두 발로 선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이동 방식을 바꾼 것이 아니라,
손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 '보행하는 인간'이라는 종(種, Species)은
두 발로 직립한 그 순간부터,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많은 길을,
이유 없이 걸어온 존재이기도 하다.
종족을 위해,
가족을 위해,
어떤 신념을 위해,
혹은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하고,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던 존재
그리고 그 모든 이동의 기록은 곧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휘어진 다리로라도 걷고,
거울처럼 비추며라도 걷고,
길을 만들며 걷고
그 모든 걸음들이 문명을 만들었고,
역사를 만들었고,
서로의 사랑을 증명해 온 방식이 아닐지.
인간은 도달하지 않기 위해 걷는 존재인가 보다.
누구도 끝내 도달하지 못할 감정,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
모순투성이인 자기 자신을 향해
단지 계속 걷는 존재인가 보다.
신은 무에서 세상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걷는 방식으로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매일을 걷는 것은
인류의 역사 때문은 아니다.
뭐가 그리 원대할 필요가 있겠어.
그건 아무래도,
내가 걸어온 지난 몇 걸음 때문에
더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매일을 걷게 되는 것일 것이다.
휘어져도 걷고,
비추며 걷고,
길을 만들며 걷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나의 하루와 그 속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을 걸음일지 모르지만,
단 한 번,
그 순간을 함께 걸었던 발자국만은
내 기억 속에는 매일같이 메아리칠 것이다.
너무 걷다 보면
무릎을 굽힐 때, 혹은 펼 때
'뚝뚝', '딱' 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니까.
아마, 그럴 테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히듯 걷고,
사라지듯 걸으면서도,
늘 무엇인가를 향해 걷는다.
그게 누구를 위한 걸음이든,
나 자신을 위한 걸음이든,
사실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걷는다는 것,
그 자체가
매번 너무 소중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