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終·種·鐘·映)

종을 종치고 싶게 만드는 종을 쓰는 장

by 삥이




인간이란 본디





연속성 없는 인생에서

연속성을 느끼며



진리 없는 인생에서

진리를 통찰하고



영원과 지식을 갈망하면서도

영원이 되지 못할 경제 지식을 얻어





끝내는


"아니었다"


라고 읊조린 뒤


눈을 감는다.






쉽게 말해보자.



인간은


단절 속에 연결을 욕망하고,

무의미 속에 의미를 발명하며,

영원이 아닌 것들에 영원을 담으려 애쓴다.








더 쉽게 말해보자.


삶은 자산 관리로는 불멸이 되지 않고,

ETF를 아무리 분산해도, 사랑은 집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 김사월 - 세상에게 / 세상에게 난 견뎌내거나 파멸하거나 할 수밖에 >









CHAP 1. 종(終)





그것은 사라져 간다는 예고일까,

혹은 덜어내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일까.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은, 반드시 '의미'라는 온도로 맞이하고 싶다.



늙는 건 무섭지 않다.

다만, 누구와 함께 늙느냐가 문제다.



어떤 모 유명 애니 작가는 '늙음이란 꿈을 잃었을 때, 눈가에 생기가 차지 아니하고, 숫자의 $표시가 떠오를 때'라고 하여 꿈을 품은 자는 젊고 아름답고, 꿈을 잃은 자는 늙고 추한 캐릭터로 묘사한다고 한다.



꿈과 노화의 관계



사라져 간다는 것.

우리는 언제 늙는가?



의학 저서에 의하면 '노화'란 본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물의 신체 기능이 퇴화하는 현상이다. 세포의 노화는 세포가 분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화는 일반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이 감소하고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며 질병에 걸리는 위험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저서에 의하면 '늙음'이란 본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변화가 동반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다. ... (중략) ... 늙음은 단순한 물리적 변화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 맥락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위 '정의'들이 모두 100% 맞는 말이며, 더 이상의 부연 설명 자체가 사치일 정도로 우리네 삶에서는 전제조차 필요 없는 공리(公理, axiom)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필자 당신께

감히 질문을 다시 한번 내어드린다.



우리는 대체 언제 늙는가.




이 물음에

누군가는 '영원'을 말하더군.


태어났으니 죽지 않겠다는,

죽음을 견디지 못한 자의 반(半)신학이다.




누군가는 '0원'을 말하더군.


예적금 잔고가 생존의 온도계가 되어버린 시대에

잔고가 비면, 존재도 비는 줄 아는 사람이더이다.




또 어떤 이는 '지금'을 말하더군.


허기를 자주 느끼고,

다리를 자주 꺾고,

새로움이 귀찮아진 시점.

무언가를 다시 사랑할 자신이 없을 때.




또 다른 이는 '조금 더 있다가'라고 중얼인다.


마음이 아직은 젊다고,

몸만 늙었을 뿐이라고,

버티듯 말하는 자.






이들은 모두 각자의 단어로 '늙음'을 말하고 있으나,


실은 동일한 사유를 부정한다.


그것은 바로,



종(終).



즉, 끝날 수 있음의 가능성.




당연하게도,

모두가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해

'지금'을 사는 법을 잊어버리고 계신 분도 있는 듯싶다.



어쩌면 늙는다는 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새로 배워 넣을 마음이 없어"


라고,

세상에 몰래 사직서를 내는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뇌는 새로운 시냅스를 만들지 않고,

가슴은 감정의 허기를 느끼지 않고,

손은 쥐지 않아도 될 사람을 붙잡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미뤄두고 싶어서

늙음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CHAP 2. 종(種)





인간은 단절의 존재다.


삶은 장면 장면이 끊기고,

기억은 때로 모순되며,

감정은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억지로 이어 붙이며 사는 때가 있다.



결국 인간은 휘발되는 그 따위의 것이 아닌

'서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종(種)이기 때문이다.




진리 없는 인생에서 진리를 통찰하려는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통찰'했다며 착각을 하기도 한다.


철학을 하고,

신을 만들고,

의미를 찾지만


사실 모래 위에 건축하는 행위였음을 깨달을 때

누가 옆에서 "괜찮아?"라고 위로해 줘도

수없이 눈물이 흐르는 때가 있는 것처럼.





어떤 이는,

이별이 끝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그 연애가 마치 영화처럼 연결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그 이를 품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이기심을 보이기도 하면서도


"제발 잘 살아"라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영생불멸(永生不滅)의 기원을 담아 헌신의 기도문을 올리기도 한다.














단절된 순간들을 잊고,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 버리는 자.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종(種).


지혜로운 사람.


Homo sapiens sapiens라는 종(Species)의 특징인 것이다.






















CHAP 3. 종(鐘)





금속을 이용해 만들어진 타악기 종(鐘).



누군가에게는

"Happy New Year~"를 외치게 되는

설레는 음율로 다가가기도 하지만,



산등성이 절 밑에 사는 저기 최씨에게는

'30분만 더 자고 싶은데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에게 거리를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속으로 느끼면서도


거리를 두려고 발버둥 치기도 한다.



어떤 이의 말은

내 귀에 달콤해서

그 이가 내 옆에서

노래를 불러도

"더 들려줘. 너무 좋았어."

라고 반응을 돌려주고 싶은데,


어떤 이의 말은

내 귀에 시끄럽기만 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한데,

'네'가 시끄러워 버리면



종(終)치고 싶어지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 아닌가.










보통의 커플들을 보면,

처음에는 같은 말도 '음악'처럼 서로에게 공유된다.


"잘 잤어?"

"밥 먹었어?"

"괜찮아?"


그 말들이 마음속에 '쿵' 하고 울린다.



그러다 '시간'이라는 이자를 받고 나면,

어떤 이들은 복리의 마법을 누리지만

어떤 이들은 아쉽게도


"잘 잤어?"라는 말을 관심이 아닌 점검으로,

"밥 먹었어?"라는 말을 걱정이 아닌 지겨운 안부로,

"괜찮아?"라는 말을 위로가 아닌 귀찮음으로 듣기도 한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 내면의 울림이 작을수록,

타인의 말은 더 크게 울리는 때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덜 사랑할 때'

타인의 말은 더 무겁고, 더 시끄러울지도.



그러니까 즉,

'네'가 시끄러운 건 아닌데,

'내'가 지금 조용한 상태.









종(鐘)을 종(終)치고 싶게 하는 종(種)이 있다.


살다 보면 꼭 "그놈이 그놈이다"는 아니더라.


다른 '종'이더라.

'나' 혼자선 조용했는데

'네'가 다가와 소리를 냈다.



그것은 관심일까.

혹은 침입일까.



종(鐘)을 멈추고 싶은 마음은

'네'가 밉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 고요하고 싶기 때문일 때가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종을 갖고 사는 듯싶다.



그 종을 언제 울릴지,

누구 앞에서 울릴지,

언제 멈출지를

우리 스스로는 잘 모른 채 살지만,



어쩌면

나의 종을 울려줄 사람이

이젠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정말 누군가의 종소리가

내 종소리와 겹쳐서

설령 불협화음을 내더라도

그것이 내 귀에 '음악'의 선율처럼 들린다면


그 감정은

"Happy New Year~"를 외치게 되는 설렘으로 번질지도 모르겠다.




탐(貪)은 불교에서 '삼독(三毒)' 중 하나로, 부정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냥 까놓고 보면 '상호작용이 낳은 기쁨'인 것처럼.


그러나 범(犯)은 반드시 경계를 넘는 것인 것처럼.




그러니까



즉,

탐은 교감이고, 범은 침해.


즉,

탐은 두 사람이 조율하며 이어 붙인 떨림이고,

범은 한 사람이 혼자 던진 소음.


즉,

명'탐종' 코난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CHAP 4. 영화(映畵)





내가 감정을 울려 보낸 공간.



그건 별 것 아니었다.





예컨대,

내 사무실 컴퓨터 속 카카오톡 대화방.





그 안에는 당신과 나,

그 사이의 말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거울을 보았던 얼굴이 있다.



'익숙한 장(場)소'에서 '낯선 장면(面)'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까,

그저 공간이었던 자리가

'하나의 신(scene)'으로 각인되는 때.


마치 연속성 없는 인생의 장면들이

편집되어 이어 붙은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지는 순간.




이전의 기억과

그 이전의 시간들까지 전부 호출하며,

서사라는 이름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그런 때.


결국,

인간은 그렇게 서사를 만들며 살아가는 종(種)이 아닐지.




철학을 하고,

의미를 찾고,

신(神)을 마주하면서도


사실 모래 위에 건축하는 행위 따위가 아니라

그 모래벽을 빚는 내 진심이 기어코 강한 무기였음을 깨닫는 때가 있다.





그렇다.




인생이 허구였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그 허구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지.



진리 없는 인생에서 진리를 통찰하는 허구적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사람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아,


그래서,

마지막이 아름다웠던 어르신들이 그런 말을 남기셨나 보다.


"인생은 그날의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아,


그래서

시인 정지원의 말에는 그러한 문장이 담겼었나 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얼마나 황망하고,

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이 얼마나 설득력 없는 말인가.
















그러나

그 말만큼

나를 빛내줄 말은 또 없다.











어떤 모 유명 애니 작가는 '늙음이란 꿈을 잃었을 때, 눈가에 생기가 차지 아니하고, 숫자의 $표시가 떠오를 때'라고 하여 꿈을 품은 자는 젊고 아름답고, 꿈을 잃은 자는 늙고 추한 캐릭터로 묘사한다고 한다.




황망하고,



허구적이고,



설득력 없는 이 세상에서



늙는 건 무섭지 않다.



다만, 누구와 함께 늙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거슨 알 슈가 옶기 때무넹

ㄴr는 오늘도 그냥 살뿐이다.



마치 래퍼 우원재의 MOVE 속 가사처럼.




















누군가 내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건 뭐야? 너도 돈이나 좇고, 꿀이나 열망해 봐."













내가 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는 못하겠어. 그냥 이런 멍청이도 세상을 사는구나 정의해 줘."












@삥이의 브런치 제73번째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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