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자 너무 멋있어 ㅠ_ㅠ

라고 말했지만 그냥 내 할 말만 주절 거리는 브런치

by 삥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 시이나 고 - 카마도 탄지로의 노래 (Feat. 나카가와 나미)>






2.gif 출처 - https://m.blog.naver.com/terry0946/222165246604



십이귀월 상현의 삼(参).

猗窩座, 아카자.





透き通る世界(내비치는 세계).

그 지고한 경지를 동경하던 자.




작 중 그는 그 투명한 경지에 닿기를 간절히 원하는 모습을 보인다.



모든 것을 벗어낸 맨몸의 단련,

잡념 없는 결투의 순간,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실감이자,

죄책으로부터 도망칠 유일한 문이었기 때문이다.




약자를 혐오하고,

강함에 중독된 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약자를

지켜내지 못했던 자였기에.



본인 스스로가 혐오스러운 존재였기에.

(※ 스포주의: 전투에서 끝내 자해하고 싸움 포기함)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지 못했고,

아버지를, 스승을, 연인을,

가진 모든 것을 잃은 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증오한 자.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맨손으로 부숴버린 자.











아카자.gif 아카자



猗窩座.

그의 본디 이름은 狛治, '하쿠지'였다.



그의 이름을 해석하자면,


'코마이누(狛犬)',

신사의 수호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태어난 이름.

누군가 곁에 있으라 허락된 존재.





애석하게도,


하쿠지는 지키고 싶었던 자.

아카자는 지키지 못한 자.







猗, 얌전해진.

窩, 집, 구석.

座, 앉은 자.


지켜내지 못한 집(窩),

그 안에 갇힌 자기혐오(猗),

그리고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정지된 운명(座).


얌전해진 짐승이 구석에 앉아 있는 형상.

도망치듯, 멈춰버린 죄책감의 자리.


아카자.







그 이름은 무잔이 붙였다.


무잔은 그의 본명을 빼앗았고,

그의 존재를 한 자 한 자, 조롱의 언어로 새겨 넣었다.





猗窩座.

단지 악귀의 이름이 아니다.


지켜내지 못한 자에게 붙은 사형 선고,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라는

잔혹한 선언이었다.






父.

師.

愛.


아카자는 누구도 지키지 못한 채,

누구보다 약한 자가 되었다.














CHAP 01. 단 한 번도





그것은 사라져 간다는 예고일까,

혹은 덜어내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일까.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은, 반드시 '의미'라는 온도로 맞이하고 싶다.



늙는 건 무섭지 않다.

다만, 누구와 함께 늙느냐가 문제다.





죽음.gif





그것은 혐오스러운 자에게 풍겨오는 냄새일까,

혹은 진정 나에게 나는 징그러운 땀냄새와 같은 것일까.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은 반드시 '온도'라는 의미로 맞이하고 싶다.



죽는 건 무섭지 않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살면서 참는 것에는

이골이 나지 못해 왔다.



누르려 해도,

의지라는 것은

언제나 한 발 늦게 도착하는 법이었고.



온갖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행해오되



그 모든 쾌락의 끝에는

어김없이

썩어가는 감정의 냄새가 따라붙었다.






그 역한 냄새는

늘 내 안에서 피어올랐고,



나는

그것을 멈추기 위해

수천 번, 브레이크를 밟았다.











욕망보다 먼저 끓어오른 것은,




항상




혐오였다.










하지만,



이골은 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CHAP 02. 단 두대





1789년 10월 10일.



1792년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선포되기 이전의 마지막 왕정 체제였던 프랑스 왕국(Royaume de France)의 의사이며 동시에 정치인이었던 조세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1738년~1814년)은 하나의 재미있는 '사형 제도'를 제안한다.



그는 '고통 없는 죽음'을 원한 인도주의자였고, 귀족과 평민은 직업과 신분의 귀천(貴賤)없는 세상에서 '동등하게 죽어야 한다'라며 말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개념으로는 '죽음조차 평등해야 한다'라는 역설을 세상에 처음으로 들이밀었던 권력가였던 것이다.





죽음을 반대한 사람이 내놓은 죽이는 기계





SJOH-9Lf7Whjoq52QBTYAg.jpg ⓒ Readly



아직 왕정 체제의 국가에서 '사형을 폐지하려 애쓴 의사'가 있다면 그 이름이 바로 조세프이냐스 기요탱이었다.



모든 계층은 같은 방식으로 죽어야 한다.

고통은 줄여야 한다.

가족은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

시신은 돌려줘야 한다.

유죄 판결을 받은 자의 재산은 몰수되지 아니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고통 없이 죽여야 한다는 그의 1789년 10월 10일의 제안은 감형이 아닌, 인간 존엄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결코 '무서운 기계'가 아니었다.



화형, 바퀴 부러뜨리기, 끓는 물에 삶아 죽이기, 사지 절단 등의 방식이 아닌 인도적인 '단순한 기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는 원칙 하에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을 제안했을 뿐이었다.



고통 속이 아닌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게' 처벌을 하는 행위.



그는 기계식 참수만이 사형의 유일한 방법이 되는 공정한 제도로서 확립될 수 있다면, 대중들은 자신의 제안에 감사함을 느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제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반대 의견을 내놓는 것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바꾸지 않았었다.



더 인도적이면서도 덜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은 곧 언젠가 '완전한 사형 제도의 폐지'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꿈이었던 것이다.



또한, 참수가 이렇게 빠르게 진행된다면 장기간의 고통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열광하는 군중의 규모와 목소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도 공존했었을 것이다.




자비로운 죽음을 이해하기에 사람들은 복수를 원했다






1789년 12월 1일.



기요탱은 의회에서 사형에 대한 후속 연설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이제 내 기계로 눈 깜짝할 새에 네 목을 베어버리겠다. 너는 그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의미 있는 말이 아닌 '농담'으로 퍼졌고, 농담은 노래가 되었으며, 노래는 기계에 이름을 붙였다.



la guillotine(기요탱의 것).








그리고 마침내,

1792년 4월 25일.



프랑스 파리의 Place de Grève,



지금의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 기요탱의 기계는 처음으로 사람의 목을 잘랐다.



그날의 희생자는 니콜라 자크 펠레티에르(Nicolas Jacques Pelletier).



도둑질과 강도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자였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한 방식은 그 자신보다도 '사형의 방식 자체'가 더 주목을 받았던 날이었다.



집행자는 찰스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



그는 수많은 사형을 집행해 온 남자였지만, 이 날은 특별했다.



기계는 이미 감옥 부근에서 시신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의 시험 가동을 거친 상태였고, 블레이드의 각도와 속도까지 조정이 끝난 날이었다.



칼날은 정확히 떨어졌고,

피는 너무나도 빨리 흘렀고,

군중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누군가가 말했다.


"이건 재미가 없어."

"예전 교수형이 더 극적이었지."



그렇다.



고통을 제거한 단두대는, 공포마저 제거해 버렸다.



사람들은 죽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만들어내는 감정을 갈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파리의 골목마다 풍자시와 조롱의 노래가 돌아다녔고, 기요탱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감정의 상징이 되었다.



그날의 단두대는, 펠레티에르를 죽인 것뿐만이 아니라 기요탱의 꿈을, 인도주의를, 이상주의의 정수마저도 단칼에 베어버린 사건이었다.







1795년 11월.



기요탱은 또다시 자신의 제안이 '비극'으로 치닫음을 깨닫게 된다.



단두대 희생자들이 참수된 후에도 몇 분 동안 몸을 움직일 만큼 의식이 남아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편지.



그는 la guillotine을 통해 인도주의적인 사형과 사형 제도 폐지의 첫걸음을 기대했으나, 가장 감정적인 폭력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기요탱을 무너뜨리기까지는 '단 2대'면 충분했던 것이다.



죄인을 죽인 1대, 그 이후 군중들에 의해 자신의 꿈이 짓밟히는 1대.




그날의 단두대'단 2대'만으로 하나의 인도주의를 잘라냈으며,


기요탱은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었지만,


세상은 그보다 훨씬 조용한 칼날로 서로를 자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묻는다.


"광고 업체가 자기한테 일을 달래요."




누군가는 답한다.


"보기 좋게 무너뜨리려면 단 2대면 충분해요. ROI 없는 보고서 1대, 어쩔 수 없었는데 대안도 없다는 1대."





그 두 대는,



정확히, 감정으로 남기 마련.




















CHAP 03. 단 세 겹의





영화사 이래 역대 최고, 최초, 최단의 기록을 연일 경신 중인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아카자 재래(劇場版「鬼滅の刃」無限城編 第一章 猗窩座再来)>.



공식 설정으로는 혈귀 사냥꾼 기둥(주/柱)들조차 상현3부터는 직접적인 1:1 상대가 불가능하다.



작 중 카마도 탄지로와 수주(水柱) 토미오카 기유도 2:1로 아카자를 상대했지만, 정작 아카자는 자결을 선택하며, 그 아무도 지키지 못한 자신의 '약함'을 '혐오'하여 지옥길을 스스로 걸었다.



선이 악을 이긴 것도 아니고,

악이 선에게 진 것도 아닌,



무한한 철학.

그 속의 답 없는 답.

진리 없는 현세를 반영한 진리.









인간은 태어날 때,

단 하나의 이름을 받는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세 겹의 감정을 덧입는다.




첫 번째는 사랑.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시선 속에 자라나며,

우리는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라는 믿음을 배운다.

혹은 '누군가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라는 가능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상실을 겪는다.


사랑을 놓치고, 품을 잃고, 시선이 꺼진 뒤에 남는 그 자리.


그 감정의 잔해는 '왜'라는 질문조차 쉬이 허락지 않는다.


지켜내지 못한 존재는

지켜지지 못한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기 어려워진다.





결국에 세 번째로 혐오의 감정을 덧입는다.


그 감정은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향하는 유일한 언어일지도.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

멈춰버린 말 한마디,

사라져 간 약속의 잔해.




아카자도, 기요탱도,

이 땅을 밟은 모든 존재는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DNA 속에 각인된 사명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손에 쥔 건

목을 자르는 칼날이었고,

그들의 이름은 지켜내지 못한 이의 대명사로 역사 속에 남고는 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세상은 다들 차가워. 왜 그렇지?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라는 말로 누군가의 목이


동시에 베이지 않을까 싶은 굴레.


즉, 무한의 성.




먼 과거에는 주먹,

그보다 가까운 과거에는 칼,

그보다 가까운 과거에는 총.

이 모든 시대에는 '돈'이라는 화폐가 지키는 무기이자 죽이는 무기로서 동시에 양립되며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네 아버지들은

"고생시켜서 미안하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우리네 어머니들은

"우리 아이, 꼭 좋은 삶을 살거라"

라며 못 다해준 꿈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더라지.








묻는다.



무너진 후의 감정은, 선인가 악인가.

지키지 못한 자는, 죄인인가 목격자인가.

혐오는 악의 결과인가, 선의 찌꺼기인가.





우리네 삶 속 인간들은 쉽게

'성악설' vs '성선설'이라는 주제를 들이밀며

자신만의 견해를 내비치고 토론을 한다.



당연하게도 이 대립은 내가 죽을 때까지

'논증'만 될 뿐 '입증'되지 못할 주제로 남을 것이다.





성악설(性惡說).

어쩌면 그 말은 사치는 아닐까.

악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자들은,

대게 스스로를 '지켜낸 적 없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성선설(性善說).

그건 또 다른 독선이지는 않을까.

선하게 태어난다고 믿는 자들은,

대체로 처음 상실을 겪기 전까지는 분명히 선하다.


그러나,


애정 결핍, 말의 공백, 응답 없는 시선 앞에

그다음은 사랑이 아닌 계산이 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니,

선과 악은 원인이 아니라,


어쩌면,

반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켜지지 못했을 때.

말이 부서졌을 때.

손이 멈췄을 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들어야 했을 때.



그때부터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그냥 어떻게든 살아 있는 덩어리로 남을지도.


눈빛은 굳고,

말은 짧아지고,

그저 멈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날을 세울지도.




작 중 아카자는

지켜내지 못한 감정이 증오로 부패한 결과물로 대중들의 '아자카 좋아♥ vs 아카자 싫어 ㅡㅡ' 반응을 유도해 낸다.



역사 속 기요탱은

좋은 의도로 제안한 la guillotine이 군중들로부터 웃음으로 처단당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그냥 어떻게든 살아 있던 살 덩어리들.



어쩌면,


그런 것이 나라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

이름 붙일 수 없는 반응.

그리고, 절대 되돌릴 수 없는 무너짐.









그러니 묻자.


무너진 후의 감정은, 선인가 악인가.

지키지 못한 자는, 죄인인가 목격자인가.

혐오는 악의 결과인가, 선의 찌꺼기인가.




아니,


인간은 선한가,

혹은 악한가.












그를 '악'이라 말하는 순간,



나는 선해지는가?





그를 이해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더 고귀해지는가?









아닐걸.




정말 아닐걸.




질문 자체가 이미 누군가를 잘라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건 칼일걸.




말의 칼.













숨은 참아도 말은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너무 큰 소리는 항상 칼이었고,

가장 조용한 문장은 결국 사(死)였지.










죽음을 마음에 품고

삶을 꾸역꾸역 삼키며,

견디는 날의 무게가 마음을 눌러오되,



다만 내일로 걸음을 미룬 자의 마음에,



숫자를 메기노니,

'사(死), 사(四), 사(愛)'가 되더이다.





CHA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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