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멜랑콜리

키보드에 '왜'를 800타 속도로 빨리 쳐보세요.

by 삥이





본디 인간이라 함은

메타인지가 잘 되어 있을수록,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성찰할수록

외롭고, 우울하고, 자신감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즉,

'앎'이 많아질수록,

자신에 대한 판단은 엄격해지고,

세상에 대한 감각은 섬세해져서,

그만큼 고독해진다는 말과도 같다.





철학적 진실이며,

동시에 정서적 감각의 결과.






왜일까,


혹은


오해일까.









그렇다면,



'모르는 자가 더 행복하다'는 말은 진실일까,

혹은 앎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의 푸념일까.




혹은,

지혜라는 이름의 칼날이

자기 자신을 먼저 찌르기 때문일까.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혜는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가.

왜 앎은, 우리를 오히려 더 외롭게 만드는가.




그 질문을 붙잡고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철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철학의 끝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다시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도,







그럴지도 모르겠어.





<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제목: 기획자의 멜랑콜리.





어떤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지금의 감정은 내일 어떤 내러티브가 될까.

관계의 흐름이 구조 속에서 어떻게 굴절될까.



그러니 때때로 '확신'이 멀어지고,

때로는 '결정'이 주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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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아는 자는 쉽게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모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기획자는 늘 조용한 우울을 갖고 있다.






이를 학문으로 풀어보자.


정확하게 이와 비슷한 명제를 주장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대표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대표주자들인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 왕국),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프랑스 공화국),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프랑스 공화국),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독일 연방 공화국) 등이 그러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면서도, 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서 온다'라는 논제로서 인간이 가진 '선택의 자유'라는 신의 권능이 고통이며 동시에 축복이라 주장됐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Angst)은 존재로 향하는 길이며, 던져진 존재(Dasein; 다자인)인 '인간'은 끊임없는 질문과 메타인지의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으며 타생물(존재)들과의 차이를 나타낸다.



또,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 형벌을 받는다'라고 정의되어 정체성 없이 태어난 우리 인간은 매 순간 자기 기획을 통해 존재를 정의해 나아가는 존재라 언급되었으며,



더불어 카뮈에 의하면 삶은 '부조리'한 것으로 인간은 의미를 찾고 싶어 하나 세계는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은 삶의 부조리를 자각하고도 그 속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존재라고 언급하였다.







왜일까?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를 거론하라고 하면 세계는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 답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축구와 철학의 본고장이었다. 'ㅊ'의 법칙 ㅎㄷㄷ;;)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의 인물에 준하는 자를 무기 삼아 "뭔 소리래"라고 통렬한 반박을 날리니 그 주인공이 바로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인류사 전체를 관통해 온 학문. 그중 '철학'에 대해 선제적인 반박을 가함으로써 인간과 타생물을 구분 지어 '존재'에 대해 물음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역할'을 갖는다고 정의했다. (쉽게 말해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존재가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역할'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당신에게 질투했고, 슬펐고, 기획했고, 관찰했고, 글을 쓰고 있노라면 그것은 내가 지금 이 감정 속에서 존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그중 "왜?"를 품을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을 Dasein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은 즉 '현존재'로 정의되어 타생물과는 구분된 존재라고 재정의되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생전, 존재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스스로 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 철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학자들도 데이터를 기반해 추론하고는 한다.



하지만 존재론자이며 동시에 현상학자였던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앎의 구조'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우리 인류에게 교훈을 줬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인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에 의해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AI의 수혜를 입는 우리 인류는 여전히 그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에는 '존재하는 자가 스스로를 반영한다'라는 윤리 자문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






왜일까?





왜,


그는 우리에게 존재를 잊지 말라며 당부하는 것인가.



경영학과 그중 마케팅이라는 학문에서도 '메타인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거론된다.



조직 구성원 한 명 한 명과, 조직 전체가 스스로에 대해 메타인지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문장 한 줄이 데이터를 전환해내지 못하게 되며, 종국에는 수천만 원은 기본이요 수억 원어치의 광고 예산이 허공으로 증발하는 사례가 발생하게 된다.



종국에는 HRM(인적자원관리)에서도 메타인지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도산 위기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 '기업 자금'과 '인적 자본'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역할을 갖는 법일진데, 그 기능을 수행하려면 메타인지가 선행되어야 하며,



즉, 존재는 인지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동시에 증가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에서는 '메타인지' 개념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렇지는 않을지.


















해답 없는 질문.


가능성의 이름.


반복되는 망설임.





사람들은 "기획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기획자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살아남아있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이길 바라는 때가 있다.





기획은 답이 아니라

방향을 설득하는 일이고,



의도를 포장하는 기술이면서도,

결국은 의미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감각이기도 하니.




그 구조 안에는 늘 질문이 담겨 있다.


" 이 일을 하지?"

" 이걸 지금 말해야 하지?"

"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묻고 또 물을수록,

답은 멀어지기 마련.






인간은 자유의 형벌을 받는다.



사르트르가 속삭였다지.



수백만 개의 선택지 앞에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렇다고 진지해져 보려 하니



세계는 부조리하지. 중요한 건 반항하는 인간일 뿐.



카뮈가 속삭인다지.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

내가 설계하는 구조물.

모든 것이 때로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안의 시지프를 사랑하고, 이 돌을 또다시 굴려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그 불안은, 네가 가능성 속에 있기 때문이란다.



키르케고르,

당신이 속삭일 테지.



나는 불안한 존재가 당연하기에.



아직 실패하지 않았지만,

아직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들도 안에 있기에.



그래서 나는 불안한 존재가 자명하기에.



기획이란 가능성의 이름이자

해답 없는 질문 속에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는 방식이기에.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왜일까.



이 방황은 전략일까.

아니면 불안을 포장하는 미화일까.








왜일까.



이 고민은 진짜 기획일까.

아니면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만 좇는 독백일까.











그리고,



그 모든 불안을 덮는,



한 문장이 있다.







오해일까.







혹시 이 모든 게 오해는 아니었을까.



내가 믿고 있는 문제 정의,

내가 설계하는 타깃의 욕망,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스토리 자체가



사실은 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쯤은,



물어야겠지.

















키보드로

"왜일까"를 빨리 두드리면,

"오해일까"로 출력되는 때가 있다.






그렇듯,

인생은,



'왜'와

'오해'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어,

'내일도' 기대하게 만들더라지.








진리 없는 인생에서 진리를 찾는 우리는,

오해 없는 세상에서 살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을 '왜?'라고 반문하는



Dasein이기에.






혹시,


Dasein도 오타가 나면


Design으로 출력될 수 있을지,


꿈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겠다.







결국,


우리 인간의 인생을 디자인하는 것은


'왜'라는 물음을 거쳐야만 할 테니까.













그렇지?







나 외에 당신네들은,


어떤 오해로 자신을 디자인하고 있는지,


언젠간 듣고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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