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도....ㅇ
태어났다는 것은
빛이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는 뜻이었다.
그 부름에 응하였으므로
나는 이미 구원받은 존재였다.
그대의 웃음은 찬미였고,
그대의 눈물은 세례였다.
나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할 테지.
"기억하라, 우리가 있었다."
그 말 한 줄이면 충분하리.
기억은 부활의 다른 이름이니.
함께 울고,
함께 무너졌던 그날마다
신은 잠시 우리 안에 머물렀다.
살아서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선택마저 필연이다.
남을 것인가,
타오를 것인가.
나는 불길을 택할 때가 있다.
불은 사라지지만,
그 재로 누군가의 길이 밝혀지리라 믿기에.
행복은 길이 아니라 온도였다.
나는 뜨거웠고,
그 뜨거움이 곧 나의 기도였다.
도망치지 않았다.
믿음은 손을 놓지 않을 테니.
칼날 끝에서조차,
무릎 꿇지 않았다.
믿음은 손을 놓지 않을 테니.
모든 강한 마음들이
서로의 피를 나누며 하나의 몸이 되었다.
믿음은 손을 놓지 않을 테니.
그러니 살아 있는 그대여,
그 존재만으로 이미 거룩하도다.
빛이여,
우리의 헌신을 기억하라.
어느 날, 존경하는 어떠한 인물.
그러니까, 소중했던 인물이 물었던 질문이 있다.
"갑자기 말이에요. '아 얘 말투 왜 이러지, 얜 진짜 말투가 왜 이러지' 라고 느껴진다면.. 그건 내가 변한 것일까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과거의 어떠한 글의 구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종을 갖고 산다. 그 종을 언제 울릴지, 누구 앞에서 울릴지, 언제 멈출지를 우리는 잘 모른 채 살지만 .... 어쩌면, 내가 조용히 숨 쉬던 그 시간에 누군가의 말이 닿아버렸던 걸지도 모른다.
말이라는 건 때로, 종처럼 들린다.
누군가에겐 설레는 "Happy New Year"의 종소리가, 또 다른 산골짜기 누군가에게는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소음의 종소리가 되듯.
그 말이 시끄러운 걸까, 내가 지금 조용한 걸까.
아마도,
그것은 아마도,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내 지금의 감정 상태에 더 가까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말은 종처럼 울린다.
어떤 날의 말은 음악과 같고,
어떤 날의 말은 침입과도 같다.
나의 '조용함'이 깊어질수록,
그 이의 '평범한 말투'는 더 크게 울린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종을 울리는 건 당신이겠지만,
그 울림의 크기를 정하는 건 필히 나일 것이다.
당신이 내게 날리는 수천 개의 물음표를
내가 '불신'으로 받아들일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받아들일지
전적으로 당신이 아닌,
내 몫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난 틀렸고,
당신은 옳다.
허나 틀렸다.
난 맞았고,
당신은 옳지 않다.
내 세상,
내 삶 속이라서 그렇다.
우리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의 잣대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관 안에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습성.
그러니,
그대의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 말이 대단히 날카로웠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그대를 애정했던 만큼
그 울림이 내 안에서 커졌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라는 이름의 얼어붙은 평화가 세계를 조용히 옥죄고 있었다.
미합중국 vs 소비에트 연방
두 강대국은
총 대신 체제를,
칼 대신 이념을 겨누며
세계를 둘로 쪼갠 지도 위에 경쟁을 그렸었다.
시간이 흘러 1959년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 Ruz, 쿠바 공화국, 당시 쿠바 총리)가 미국의 지원을 받던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분노를, 소련을 기회의 씨앗을 엿본다.
그러던 1962년 10월, 미국의 정찰기(U-2)가 쿠바 상공을 비행하던 중 소련제 중거리 핵미사일 기지의 건설 현장을 포착한다.
쉬운 말로 '조졌다' 싶은 상황이다. 총칼이 수면 위로 드러나려던 위기.
쿠바는 미국 본토에서 겨우 145km 거리였으며, 워싱턴 D.C.까지 10분이면 '죽음의 시간'이 도달하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미국 시민들은 공포에 빠졌고, 국가 수뇌부 입장에서는 뭔가의 제스처가 필요했던 사건이었다.
존 F. 케네디는 즉시 미합중국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고, 세계는 숨을 죽였다.
이전까지의 모든 전쟁과는 달리 미국의 힘은 이제 '말 한마디'가 지구를 지워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군부의 '공습' 요구를 누르고, 군사적 '봉쇄(blockade)' 대신 '검역(quarantine)'이라는 단어를 택하며 상황을 모면한다.
세계가 다시 전쟁의 불지옥으로 빠질지 말지 결정된 건 대단히 대단하고도 대단한 서류 몇 장이 아닌 '단어' 하나였던 셈이다.
검역은 병을 막기 위한 방어고,
봉쇄는 전쟁을 여는 공격으로 기능하는 단어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선제적 타격'보다는 기다림을 선택한 것이며, 그러면서도 '미국이라는 국가의 품격'을 유지하며 단어 선택을 한 것이다.
소련 선박이 쿠바로 향하는 바다 위에서 미국 해군과 정면으로 충돌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떠돌던 어느 날 니키타 흐루쇼프(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소비에트 연방, 정치인)는 미국에 2통의 편지를 보낸다.
① "우리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면, 당신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노라 약속해 주시오."
② "아울러 당신네들이 튀르키예 앞바다에 배치한 미사일도 철수하시오."
두 편지는 하루 차로 도착했고,
두 번째 편지는 분명히 강한 어조로서 전쟁을 향해 닿아 있는 '권위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첫 번째 편지에만 응답했고,
분노와 타협 사이에서
단 하나의 문장만을 선택해 울렸다.
그 선택은 역사적 감도였다.
결국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 선언했고,
케네디는 비공식적, 비공개적으로 튀르키예에서 미사일 철수를 실행했다.
그렇게,
인류는,
말 한 줄로,
자기 멸망 직전의 문턱에서 돌아섰다.
흐루쇼프는 두 개의 편지 중
어떤 말에 대한 대답이 올지 궁금했을 것이다.
케네디 역시 수많은 고민을 하고,
각 수뇌부로부터 자문을 받았을 테지.
총과 칼이 세계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요즘 시대에서는
이렇듯 말 한마디가 국가 존망을 가르기도 한다.
어떤 말은 날카롭고,
어떤 말은 부드럽다.
둘 다 들었지만,
울리는 것은 하나이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의 종은
어떤 말에만 반응할지 감도를 선택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Good-MORNING!
Even before I rise, my thoughts throng to you, my Immortal Beloved!—sometimes full of joy, and yet again sad, waiting to see whether Fate will hear us.
I must live either wholly with you, or not at all.
Indeed I have resolved to wander far from you—until the moment arrives when I can fly into your arms, and feel that they are my home, and send forth my soul in unison with yours into the realm of spirits.
Alas! it must be so.
You will take courage, for you know my fidelity. Never can another possess my heart—never—never!
Oh, heavens! Why must I fly from her I so fondly love?
And yet my existence in W. was as miserable as here.
Your love made me the most happy and yet the most unhappy of men.
At my age, life requires a uniform equality; can this be found in our mutual relations?
My angel, I have this moment heard that the post goes every day—so I must conclude, that you may get this letter the sooner.
Be calm, for we can only attain our object of living together by the calm contemplation of our existence.
Continue to love me.
Yesterday, today—what longing for you—what tears for you—for you—for you—my life—my all—farewell.
Oh, love me forever, and never doubt the faithful heart of your lover.
—L.
Ever thine.
Ever mine.
Ever ours.
위 편지는 1812년 7월, 오스트리아 테플리츠에서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으로 불린 익명의 연인에게 쓴 총 3통의 미발송 편지 중 마지막 편지라고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해당 편지는 사후에 유품 정리 중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당시 그가 썼던 편지 사본은 종이도 얇고 흐릿한 데다, 글씨체도 매우 불규칙적이고 난해했기 때문에 완전한 원본으로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당시 베토벤과 익명의 연인은 사회적 신분과 현실적 제약 속에서 함께할 수 없었고, 베토벤은 사랑의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절망 속에서도 끝내 그 말을 어딘가에는 기록했던 것이다.
결국 말은 쓰였으나 닿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처럼, 진심이 담긴 편지를 건네지만, 상대의 사정과 나의 감도 때문에 그 말이 영영 미발송 된 채 엇갈리는 시간을 살고 있는 때도 있다.
우리 인간은
어찌하여 어느 순간부터
같은 말을 다르게 듣게 되는 걸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자극을 지나치며 살아간다.
그 모든 자극을 감당할 수 없기에,
우리의 뇌는 자동으로 선별한다.
'어디에 주의를 줄 것인가.'
그렇게 선택된 자극은
두 번째 필터, '지각'을 통과한 후
'의미'라는 이름으로 변환된다.
예컨대,
내가 그날따라 그 사람에게 집중을 덜 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인식할 것이다.
"오늘은 나에게 마음이 덜 향해 있구나."
하지만 그 사람이
'평소에는 집중을 잘해주던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하루쯤은,
그 다름을 용서해 줄 것이다.
'까방권'은 그렇게, 관계 안에서 획득된다.
<그러니까 하루쯤은 괜찮아.>
그러나 '하루쯤'이 '종종'으로,
'종종'이 '대부분'으로 바뀌는 순간,
말은 감도를 잃기 시작한다.
다른 어딘가에서 더 섬세한 감정,
더 깊은 교류를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말들에 거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떡볶이 한 접시에 감탄하던 사람이
이젠 치즈추가와 튀김세트 없이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프랑스 공화국의 인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년~2002년)는 사람의 말을 두고 자본(habitus)이라는 개념을 덧입혀, 말이 가진 상징적 힘은 사회적 위치와 결속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예전에는 친구들과 주고받던 말이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언어였다면,
어느 날부터는,
그 말로는 나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문법이 바뀌고, 호흡이 달라지고,
진심의 밀도가 달라지는 시기를 맞이한다.
같은 말을 두고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멈칫하는 시간.
관계란, 그 시간을 얼마나 오래 견디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보통 우리네 인간관계가 그렇다.
예전에는 게임 한 판을 해도 '너 그 게임을 그렇게 해? 엌ㅋㅋㅋㅋㅋ'으로 통하던 친구가 어느 순간에는 '넌 왜 그 게임을 그렇게 하려고만 해...'라는 아쉬움으로 내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그 감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그 친구가 대단히 잘못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사물'을 보는 내 시선과 자세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동반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나의 내면, 신경, 환경, 관계, 세계관이 점진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는 그 친구가 나를 설명하기 위해 '성호라는 친구는 게임을 이렇게 해욬ㅋㅋㅋ'으로는 더 이상 내가 만족이란 감정을 품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의 나는 더 이상 그 말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뇌는 더 정밀한 문장을 갈구하고,
마음은 더 따뜻한 응답을 그리며,
관계는 더 깊은 울림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당신이 불편해진 건 아니다.
단지,
당신의 말이
나의 리듬에서 조금씩 이질감을 띄기 시작했을 뿐이다.
내가 당신을 떠날 것은 아닌데,
내가 조금 새로워졌을 뿐이다.
노화일까.
성숙일까.
가끔은, 어떤 말이 불편했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기꺼이 답해보고 싶은 때도 있다.
우리가 '언어감수성'이라 부르는 그 예민한 감각은, 타인의 말투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지불해 온 '헌신의 총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내 안의 세계가 깊어질수록, 뇌가 더 정밀한 문장을 갈구하고, 마음이 더 깊은 울림을 원하게 된 것은, 이 삶을 '뜨겁게' 살았다는 피할 수 없는 증거였다.
결국 내가 쌓아올린 삶의 감각
결국 이 이질감은 인내의 소진이 아니라, 경험의 농축에서 오는 필연적인 징후일지도 모르는 것을.
/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말투에 상처받는 존재이기 이전에
빛에게,
그러니 우리가 관계 속에서 느끼는
그 낯섦은 '관계의 노화'라기 보다는,
어쩌면
'나라는 한 인간의 성숙'이며,
아주 작은 '부활'의 징조일지도.
/
솔까말 1도 모른다.
이 모든 장황한 논리들 너머에 진실이 무엇인지 어찌 감히 알 수 있으랴.
『이상형은 늘
멀리 있는 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가까운 호흡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태어나서'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받아들일 줄 알아서 형성된 존재였을 수도 있다.』
라는 과거 어느 글의, 어느 구절 처럼.
말은 흐려지지만,
그 말로 응답하고 싶었던 온기만은 남는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읽혀지기 전까지는 나는 수도없이 이 글을 쓴 나를 몰아세우고 있을 게 자명하다.
하지만 누군가 읽고난 뒤라면, 네가 내게 준 반응으로 인해 내가 내게 건넬 피드백마저 달라질 것이다.
감도라함은 그렇게 바뀌지는 않을지.
언어가 생각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고, 언어 습관을 성찰하여 건강한 소통을 이끌어 가는 주체가 '네'와 '내'가 된 것은 아닐지.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자들은 바로 그러한 자들이 아닐지.
우리는,
언젠가 다시 낯선 말에 직면하겠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말의 문법 너머에 있었던
망설임, 조심스러움 그리고 응답의 감도를 기억하게 될 테지.
왜냐하면 우리는,
한 번 불려졌던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도처럼 남고 싶을거기에.
말의 감도는 그렇다. 똑같은 말도 어떤 사람은 귀찮음으로, 또 어떤 사람은 기도로 듣는다. 감도는 결국 '나와 마주한 시간의 두께'로 결정되기도 하니.
『철학은 본인과 깊게 마주한 사람만이 그 서사의 끝을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면 속 고요한 얼굴을 누군가가 '정확히 읽어준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내 말이 닿았다'라고 느끼기도 한다. 말이란, 입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얼굴로부터 울리는 것이기도 하니.
『 "잘했어요." .. "나는 다 봤어요." .. "그 웃음 속 울음도, 그 농담 속 떨림도."』
'기쁨일 때의 나'도, '슬픔일 때의 나'도 사실은 당신이기도 하니.
ㅁ를 잘못 깎으면 '강도',
그 잘못 깎은 ㅁ를 하나 더 붙이면 '감동'.
우리는 강도와 감동 사이에서 '네 편'과 '내 편'을 구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