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 같은 감정에, 한 송이 붉음을
나는 아무래도, 나쁜 몹쓸 새끼였을까.
그 존재는 말도 없이 다가오고,
소리도 없이 웃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 알아채는 건,
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다.
엄마의 목소리.
형의 목소리.
친구의 목소리.
익숙하고 따스한 목소리.
그러니, 의심하지 않은 채 따라나서기 바쁘지.
그러다가, 산속으로 스며든 채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요괴 이야기.
'장산범(長山범)'의 이야기이다.
실체는 없지만
모두가 한 번쯤은 들었다고 말한다.
가까이서.
너무 가까이서.
구전(口傳)에 의하면,
그 존재는 '흉내쟁이'라고 불려진다고 한다.
'좋은 사람'을 흉내 내는 존재.
'믿을 만한 사람'을 연기하는 그림자.
그래서 더 무섭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한반도 고유의 민속 괴담.
인류사 이래 또 한 번 방점을 찍었다는 작품, 『귀멸의 칼날』.
그 세계엔 거대한 두 세력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인간을 지키겠다는 신념 아래 결성된 도깨비 사냥꾼, 귀살대(鬼狩り).
그리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요괴, '오니(혈귀)'라 불리는 존재들.
최근 공개된 『귀멸의 칼날 - 무한성(부제: 아카자 재래)』편은 일본, 한국,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역대 흥행작들을 거뜬히 뛰어넘으며 다시금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작품 속에서 오니는 분명 '절대악'으로 그려진다.
사람을 잡아먹고, 가족을 파괴하며, 삶의 무게를 허물어뜨린다.
그래서 제작진은 스토리부터 마케팅까지, 철저히 '인간의 감정' 중심으로 작품을 설계했다는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관객들은 그 오니들에게도 감정 이입을 하고,
일부는 그들에게서 깊은 공감까지 느낀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오니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딸이었고.
억울한 죽음, 가난, 상처, 버려짐.
그 속에서,
결국은
무너져 내린 인간의 파편들이었다.
작품 속에서 가장 대립적인 두 인물인
십이귀월의 수장 키부츠지 무잔과,
귀살대의 리더 우부야시키 카가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원(永遠)을 정의하고 있다.
무잔은 죽음을 결핍으로,
변화를 퇴화로 바라보며 정지된 생을 추구한다.
반면,
우부야시키는 죽음을 전제한 삶을 가장 숭고하게 여긴다.
인간의 마음, 신뢰, 그리고 남기는 것의 가치를 영원의 형태로 본다.
이 대조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오니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정의라 부를 수 있을까?
작품은 뻔한 권선징악의 틀을 끝내 거부한다.
그리고 그렇게, 독자들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남에게 해코지하지 않고, 뒤에서 험담하지 않고, 자격지심도 없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세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도, 그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또 받는 것,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 즐겁게 헤쳐나가 보자고요."
"성호님은 참 좋은 아이이시니까. 가끔은 기대어 주세요. 제게."
그래서,
그렇기에,
그랬기 때문에,
그런 아이니까.
그러나,
어느 날,
성호야,
너의 어깨가 무거워질수록,
너는 나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단다.
그 존재는 말도 없이 다가오고,
소리도 없이 웃는 법이다.
처음엔 늘 어머님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우리 착한 딸~"
"우리 똑똑한 아들~"
도덕책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한다.
그래서 의심도,
그리하여 질문도 하지 않은 채 따라나선다.
그러다가,
때로는 자신을 잃고,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라는 신분을 거친 모든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었을지 모른다.
'좋은 아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라야 했던 이야기.
혹은 장산범보다 더 무서운,
가족이라는 이름의 기대.
그 '좋은 아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라는 주문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할 때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인지, 내가 이룬 무엇인가를 사랑하시는 마음인지..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헷갈려서 조용히 눈을 감는 때가 있다.
오늘도 좋은 아이처럼 웃는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어쩌면,
나도 요괴일지도 모른다.
마치 장산범처럼, 마치 오니처럼.
나조차 나를 흉내 내고 있는 지금.
인간은 어디서 머물며 거니는가.
아니,
나는 어디에서 앉아 있던가.
그 녀석은 어딘가에서 홀로 외로이 노닐고 있던가.
결국,
좋은 아이의 가면은 단지 집 안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인간관계라는 무대 위에서.
언제나 조금 더 착하고, 조금 더 올곧은 사람처럼 연기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연기는 곧,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이려는 노력과도 닮아 있었다.
어떤 에세이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일생에 '분노'라는 감정을 더 느낀다고 의학적 저서를 들먹이며 주장한다.
세상은, 너무나도 부조리하기에,
그들은 그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감정'을 느끼는 빈도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소나무처럼 올곧은 사람처럼 보이던 이들이 사실은 내면에서 조금 더 많은 소용돌이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의에 대해 불편하고,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럴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받았으면, 상대는 필시 나의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어서이다.
내 뇌,
내 몸,
내 손,
내 주머니,
내 전화번호부,
혹은 무엇인가를.
[마태복음 14:24-25]
"이 잔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려지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이어서,
[요한복음 6:53-5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너희에게서 생육한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중략)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고대부터 레드 와인은 피의 상징으로 작용해 왔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피를 뜻하는 '성찬식의 핵심 요소'로서 쓰였다는 이야기는 세상 다양한 작품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는 바이다.
"이 잔은 나의 피로 만들었느니라."
구원의 상징이면서도 동시에 희생과 대속의 서사를 담고 있는 한 잔인 것이다.
반면, 화이트 와인은 '빛', '순수', '여명', '기쁨'의 상징으로 작용해 왔다.
중세 유럽 속 수도사들은 레드 와인과 달리 조금 더 가벼운 '경쾌함' 속에 삶의 잔잔한 기도를 담고자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우부야시키는 죽음을 향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고,
무잔은 죽음을 거부한 채 불명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무잔은 잊히는 것을 두려워했고, 때문에 시간을 얼렸다.
카가야는 사라지는 것을 수용했고, 그래서 귀살대에게 마음을 남겼다.
우리는,
매 순간, 매 분, 매 초,
심지어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낼 때마다 결정한다.
나는 어느 잔을 들었던가.
나는 사랑을 기도처럼 마셨던가.
아니면 죄책감을 기억처럼 들이켰던가.
화이트 와인은 보통 상큼한 신맛이 특징이고,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반대로 레드 와인은 특유의 성분 덕에 떫고 거친 느낌과 함께 무거운 느낌을 준다. (짱많이 마시면 핵취함)
나는 어느 잔을 들었던가.
혹은 어느 잔을 건네었던가.
우리는,
내 사랑이 이미 숙성되어 있다고 믿은 채,
지나치게 우쭐한 마음으로
그이들의 테이블 앞에 앉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술을 따른다.
마치 이 잔 하나면,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믿기라도 하듯.
하지만,
미처 모르셨을 테지.
그 술이
발효되지도 못한 맹물 같은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 사람이 느꼈을 떫은맛이
내 안에 남은 단맛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걸.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술 한 잔을 기울일 때,
술잔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기도 한다.
그 사람의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담겼는지를 무의식적으로 살펴본다.
장산범은
엄마를, 형을, 친구를, 연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좋은 사람인 척 술을 건넨다.
오니들은,
결국 '선한 사람들(일반인)'들의 나쁜 짓에 괴물이 되던 존재들이었다.
내가 건넨 잔 속에는
숙성된 농염함이 담겨 있었는가,
숙성되지도 못한 맹한 물이 담겨 있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의 눈동자 속 내 모습은
좋은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이었는가. 혹은 그저 존재도 되지 못하였는가.
나는,
맛은 없어도 감도는 있었던,
향은 없어도 온도는 있었던,
삶 속 반주 정도는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잠들기 전,
한 번쯤은,
물어야겠지.
내 잔은,
한 모금쯤은,
마실만했을까.
아무래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