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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원 Oct 28. 2022

신데렐라와 틀니

요즈음의 괴산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아니,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었다고 보면 된다.

보통 서리태 수확을 끝으로 가을걷이는 끝났다고 본다. 서리태는 서리를 맞아야 수확하는 콩이어서 서리태라고 부르는데, 며칠 전 상강(霜降)도 지났고, 시골버스가 다니는 길 옆 콩밭에는 콩 타작하는 기계가 잘도 돌아간다.

김장을 위한 절임배추 출하시기가 다가오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논외(論外)로 하자.

어찌되었건 추수가 끝나고, 농부들에게 한가한 계절이 오면, 시골 버스에는 평상시보다 승객이 늘어난다. 농사일에 짬을 내지 못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읍내 나들이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장날은 꽃무늬 몸뻬와 장화를 벗어 던지고, 집에서 제일 아끼고 좋아하시는 옷으로 성장(盛裝)을 하고 오일장 마실을 오신다.


혹시, 여러분은 평상시 들에서 일하시던 노인들이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쳐다보는 눈길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가고 싶어서 동생들과 계모가 타고 가는 마차를 보는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데렐라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무도회장에는 숙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왕자님이 있지만, 괴산 오일장(五日場)마당에는 백 바지에 백 구두를 신은 쫙 빠진 영감도 없는데...

지나가는 버스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은

'내가 저걸 타고 장에 가야 하는데...이 놈의 밭에 풀 약은 언제 다치나....' 하시는 마음이다.

그리고 속곳 속에 고이 넣어 두었던 시계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신다. 버스가 마을을 지나는 시각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거나 느리면, 군청이나 회사 사무실로 민원을 넣는다.

당신이 장 구경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에 억하심정(抑何心情)을 가지고 민원전화를 한다.

'괘씸한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장날은 꼭 첫차를 탄다.

학생들의 등교 시각을 맞추느라 애가 타는 버스 기사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아~네 월아 하루종일 버스에 승차하면서 기사의 시간을 잡아 잡순다. 그리고는 오후 2~3시면, 약속이나 한 듯이 어김없이 당신들의 집으로...

꼭, 신데렐라가 마술이 풀리기 전 자정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서 신데렐라는 왕자님과의 댄스에 정신이 팔려 자정이 다 되도록 춤을 추다가 유리구두 한 짝을 떨어뜨리고 궁전을 뛰어나가지만, 시골 노인네 들은 장 봐온 물건을 버스에 놔두고 집으로 돌아가신다.

잃어 버린 물건 이래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화장실용 쓰레빠 한 짝이나, 또는 파리채, 콩나물 한 봉지, 빨래집게 두 줄 따위... 가끔 손때가 묻어 표면이 반질반질한 지갑이나, 당신의 생명 같은 교통카드를 버스에 두고 내리실 때도 있다.

그래서 시골 버스 기사는 노선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분실물 들을 수거하여 버스 사무실에 반납하는 것이 하루의 규칙적인 일과가 되어있다.


시골 버스 기사는 산골 깡촌에서는 먹히는 직업이 틀림없다. 특히, 할머니들에게....

나이가 들어 경운기나 간신히 끌고 다니는 같은 집에 사시는 영감탱이보다, 신데렐라가 탄 마차 같은 버스를 몰고 다니는 시골 버스 기사들이 백마를 탄 왕자처럼 보이실 만도 하다.

그 증거로 시골 버스 기사에게는 집 두 채 가진 과부를 소개해준다고 은밀히 말씀하시던 할머니가 계셨을 뿐만 아니라, 60대 중반 아주머니의 은근한 눈길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심각한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했음에도 콧대 높은 아내는 콧방귀도 안 뀌는 눈치다.

'흥! 마누라! 어디 두고 봐라! '

하여간 괴산의 시골 버스 기사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버스 기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시골 할머니들은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날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한가득 싣고서 운행을 하고 있는데...

"내리신다고 말씀하시거나 벨을 누르시면 꼭 내려 드릴 테니 제발 버스가 서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미리 일어나지 마세요! 제가 어르신들 안 내려 드리고 모셔가도 어디 써먹을 데가 없어요! 장례나 치르면 모를까!'

" 그래 우리 같은 늙은이들 데려가 봤자, 송장이나 치우지..."

" 그래도 난 아직 쓸만혀! 밥도 하지, 빨래도 하지! 밭일도 잘혀! "

시골 버스 기사의 고품격 조크에 버스 안은 한바탕 웃음의 도가니로 변했고, 극소수의 할머니들은 품위 있게 보이시려고 입을 가리시면서 호호거리시지만, 대부분의 여성성을 상실한 할머니들은 벌릴 수 있는 한계까지 당신의 입을 벌리고 껄껄거리면서 남자같이 호탕하게 웃으신다.

그러나 늙은 수컷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가재눈을 뜨고서 당신들의 공동의 적인 시골 버스 기사의 뒤통수를 째려보기에 바빴다.


그날 분실물 수거차 버스 실내를 한 바퀴 돌던 시골버스 기사의 시야에 평상시 잘 보지 못했던 물체가 버스 바닥에 보였다.

손으로 주워서 관찰한 결과....


틀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분명히 아니다.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다가 분실하였을 가망성이 백 퍼센트다.

할머니들만 소리를 내 크게 웃었던 정황 증거로 볼 때...그 틀니는 할아버지들의 것이 아닌, 할머니들의 것이 틀림없었다.


내일 방을 붙여야겠다.

" 괴산군 내의 모든 할머니에게 알립니다."

"ㅇㅇㅇㅇ호 버스에서 틀니가 발견되었습니다. ㅇㅇ일 부터 이 틀니를 갖고 괴산군 내의 모든 할머니를 찾아갈 예정입니다. 그 중 이 틀니가 입에 딱 들어맞는 할머니를 찾아 시골 버스 기사의 색시로 삼겠습니다!"


아차, 말이 헛나갔다

맨 마지막 문장은 삭제...하하하

가을이 깊어감에 시골 버스 기사가 마음이 허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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